숭은 한 선생의 성격을 잘 알므로 사양하지 아니하고 한 선생이 내어주는 아랫목 자리에 앉았다. 거기는 딸 정란이 짠 얇은 방석이 깔리고 퍽 따뜻하였다.

 

"부인 안녕하시오"?

 

하고 한 선생은 아직도 반가운 웃음이 사라지지를 아니하였다.

 

"네."

 

하고 숭은 힘없는 대답을 하였다.

 

"재판소에 일이 있다고? 내 일전 부인을 만나서 들었소."

 

하고 한 선생은 인사하는 것도 어디까지든지 정성을 다 하였다.

 

"아이그, 허 변호사가 병이 중하시니 어찌하느냐고 가신다고 그리셨지요. 그러니 노자가 있어야 가시지. 가엾으셔요."

 

하고 부인은 한 선생을 보고 웃는다.

 

한 선생은 교원 자격이 없다는 이유로 금년까지에는 학교에서 보던 모든 시간을 다 내어놓았다. 학무과에서 보기에는 또 젊은 학감이나 교무주임이 보기에는 교원 자격이 없는 한 선생은 서푼어치 가치도 없었다. 그래서 이제는 한 선생은 그나마 양식값이나 들어오던 수입도 다 없어지고 말았다. 선생의 세계이던 양실을 폐지한 것도 이 때문이다. 선생의 평생의 사업인 청년 교제를 할 자리가 없어졌다. 그래서 안방을 청년 교제 하는 처소로 쓰게 된 것이다.

 

앞으로 한 선생의 생활을 보장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가 집과 세간과 있는 것을 다 팔면 이태 동안은 굶어 죽지 아니하고 살아갈는지 모른다. 한 선생은 그것으로 만족할 것이다. 그는 앞으로 이 년간 청년 중에서 동지를 구하고 청년을 조직하고 훈련하는 일의 준비를 하다가 더 먹을 것이 없이 되는 날, 그는 행랑살이나 하인으로 들어갈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런 생각도 할 여유가 없다.

 

그는 낮이나 밤이나 참된 젊은이를 만나서 조선의 이상을 말하고 조선사람이 앞으로 해 나갈 일의 계획을 말하고 청년의 사명을 말하고 조선의 희망과 자신을 말하고 이리하여 한 사람, 한 사람 조선의 힘 있고 미쁜 아들을 구하는 것으로 일을 삼고, 의무를 삼고, 낙을 삼았다. 이렇게 하는 것이 조선에 대한 은혜 갚음의 오직 한 길이요, 또 조선을 건짐의 오직 한 길이요, 자기의 일생을 값있게 하는 것의 오직 한 길이었다. 아니 지금에는 이 일은 의식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요, 그만 천성을 잃어버린 것이었다.

 

그러나 청년들은 반드시 한 선생의 뜻대로만 되지 아니하였다. 한 선생의 집에 자주 다니는 동안 그들은 다 한 선생의 뜻을 따르는 제자라면 제자요, 동지라면 동지지마는 학교를 졸업하고 혹은 직업전선으로 혹은 해외유학으로 이태, 삼년 떠나 있으면 아주 배반까지는 아니한다 하더라도 대부분 마음이 식어버렸다. 어찌하여 조선사람의 마음은 이렇게 속히 식는고. 어찌하여 한번 작정하면 일생을 변치 아니하고, 한번 허락하면 죽어도 고치지 아니하는 사람이 많지 못한고. 하고 사람들은 한탄하였다. 이것이 조선이 쇠하여진 까닭인가고 낙담하는 이도 있었다.

 

이날 밤 화제는 신라의 화랑도에 이르렀다. 신라 진흥왕 때에 민기가 점점 쇠잔하고, 백제와 고구려의 침노가 쉴 날이 없을 때에 왕은 욕흥방국(나라를 일으키고자)의 목표로 인재 배양, 인재 등용의 기관을 삼기 위하여 단군의 옛날부터 내려오는 정신을 기초로 하여 아름다운 여자를 골라 원화(源花)를 삼고, 삼백여 명의 청년을 모아 옳음을 서로 갈고, 노래와 풍악으로 서로 기꺼하게 하며 산과 물에 노닐어, 즐기어 인재를 고르고 인재를 훈련하게 하여 어질고 충성된 신하와 재주 있고 용기 있는 장졸이 여기서 나게 하였으니 그들은,

 

1. 임금을 충성으로 섬기고

 

2. 어버이를 효도로 섬기고

 

3. 벗을 믿음으로 사귀고

 

4. 싸움에 나아가 물러감이 없고

 

5. 산 것을 죽이되 가리어 한다

 

는 다섯 가지 계를 가져 의를 위하여는 목숨을 털같이 여기고, 한 번 허락하면 죽기까지 변함이 없었다. 충간의 담이 그들의 본색이요, 의를 무섭게, 이름과 이와 죽기를 가볍게 여긴 것, 사다함(斯多含), 무관(武官), 부례(夫禮), 관창(官昌), 해론(亥論), 소나(素那), 귀산(貴山) 등의 의기 있는 이야기를 들으매, 청년들은 조상의 갸륵함이 고맙고 저마다 그 정신을 배우기를 속으로 작정하였다.

 

"선생님 저는 오늘 맘에 괴로움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힘을 얻으려 선생님을 찾았습니다. 인제 힘을 얻었으니 저는 갑니다."

 

하고 숭은 사람들이 이상히 생각함도 관계치 않고 인사하고 나왔다. 그의 마음에는 기쁨과 용기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