숭은 폭풍같이 설레는 제 정신을 진정하느라고 이를 닦고 면도를 하고 머리까지 감고 아무쪼록 세수하는 시간을 길게 끌었다. 칫솔은 몇번이나 빗나가서 입 천장을 찌르고, 면도로 귀밑과 턱을 두 군데나 베었다. 칼라가 끼어지지 아니하고 넥타이를 세 번이나 다시 매었다.
억지로 식탁을 대하고 앉았을 때에 숭의 코에서는 갑자기 피가 쏟아졌다.
하얀 테이블보가 빨갛게 물이 들었다.
"코피 나셔요."
하고 유월이 어쩔 줄을 모르고 벌벌 떨었다. 그리고 속으로 정선을 원망하고 숭에게 무한한 동정을 주었다.
"아아!"
하고 숭은 참다 못하여 크게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코피도 막을 생각을 아니하고 식탁 위에 엎드렸다. 찻잔이 팔꿈치에 스쳐 엎질러졌다. 엎질러진 홍차의 연분홍빛이 숭의 피인 듯이 흰 테이블보를 적시며 퍼졌다.
유월은 구르는 찻잔을 붙들었다.
숭은 그날 하루를 전혀 혼란 상태로 지내었다. 그 이튿날도 그러하였다. 숭의 마음속에는 "원수를 갚음"이라는 생각이 수없이 여러 번 들어왔다. 그래서 그는 원수 갚을 여러 가지 방도까지도 생각해 보았다.
그러나 그는 두 가지 갈랫길을 발견하였다. 무엇이냐? 원수를 갚아버리고 마느냐, 또는 모든 것을 참고 용서하는 것이냐 하는 것이었다.
만일 원수를 갚는다면? 그러면 일시는 쾌할는지 모르거니와 저와 정선과 김갑진이 다 세상에서 버리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거기서 얻는 것은 일시의 통쾌뿐이겠다.
그렇지마는 참고 용서한다 하면 이 모든 여러 사람이 받을 손실은 아니 받고 말 것이다.
"용서하라!"
하는 예수의 가르침을 생각하였다.
그러나 간음한 아내는 내어보내도 좋다고 예수가 말씀하지 아니하였느냐. 이렇게도 생각해 본다. 허지마는 그것은 내어보내도 좋다는 것이요, 꼭 내어보내라는 것은 아니다. 또 내어보내라는 말이지 원수를 갚으라는 말은 아니었다.
만일 한 선생이라면 어떠한 태도를 이 경우에 취할까. 이렇게도 생각해 보았다. 한 선생 같으면,
1. 사랑과 의무의 무한성
2. 섬기는 생활
3. 개인보다 나라
이러한 근본 조건에서 생각을 시작할 것이다. 사랑이란 무한하지 아니하냐. 의무도 무한하지 아니하냐. 아내나 남편이나 자식이나 동포나 나라에 대한 사랑과 의무는 무한하지 아니하냐. 그렇다 하면 정선을 사랑해서 아내를 삼았으면 그가 어떠한 허물이 있더라도 끝까지 사랑하고, 따라서 그에게 대한 남편으로서의 의무를 끝까지, 아니 끝없이 지켜야 할 것이 아니냐.
또 섬기는 생활이라 하면, 숭이 제가 진실로 동포에 대하여, 나라에 대하여 섬기는 생활을 해야 한다 하면 우선 아내에게 대하여 섬기는 생활을 하여야 할 것이 아니냐. 아내를 용서 못하고 아내를 못 섬기고, 어떻게 누군지도 모르는 수많은 동포를 사랑하고 섬기고, 눈에 보이지도 아니하는 나라를 사랑하고 섬길 수가 있을 것이냐.
셋째로, 만일 숭이 제가 진실로 우리를 위하여 저를 버리는 사람이라 하면 그래 제가 해야 할 일생의 의무를 아니 돌아보고 이기적 개인주의와 같은 행동을 하다가 저 한 몸을 장사해 버릴 것이냐.
만일 한 선생 모양으로 생각한다 하면 이러한 결론에 도달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이렇게 숭은 생각하였다.
사흘 동안 고민한 결과로 이러한 결론에 다다랐다.
이에 그는 곧 김갑진에게 편지를 썼다.
"김군, 나는 형이 내 아내에게 대해서 한 모든 허물을 용서합니다. 또 형으로 하여금 친구의 의리를 저버리고 간통의 죄를 짓게 한 내 아내의 허물도 용서합니다. 형이 내 아내에게 보낸 그 옳지 못한 편지도 내가 이 편지를 쓰고는 불살라 버릴 터입니다. 그러나 다시는 내 아내에게 대하여 죄 되는 생각과 일을 하지 말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형 만한 재주와 포부를 가지고 지금의 생활을 버리고 동포를 위한 새 생활을 하는 이가 되기를 바랍니다"
이 편지를 써 놓고 숭은 갑진의 편지를 불사르려 하였다.
그러나 갑진의 편지에는 일종의 유혹이 있었다. 그것은 이 편지를 정선에게 보이자는 것과 또 후일에 힘 있는 증거를 삼자는 것이었다. 숭은 성냥을 그어서는 끄고, 그어서는 끄기를 세 번이나 하였다. 그러다가 네 번만에 숭은,
"나의 약함이여, 약함이여!"
하고 그 종이 조각을 태워 버렸다. 그 종이 조각이 타서 재가 되어 스러질 때에 숭의 마음은 흐렸다가 밝아지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