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선은 귀여운 아내가 아니냐. 그를 버려둔 것은 남편인 숭의 잘못이 아니냐. 귀여운 아내는 귀여운 아내로서 저 맡은 인생의 직분을 다 하는 것이 아니냐. 어린애의 이기적인 것이 귀여움의 한 재료가 되는 것과 같이 귀여운 아내는 이기적이요, 아닌 것이 도무지 문제 삼을 것이 없는 것이 아니냐.
귀여운 아내란 것은 꽃이 아니냐. 열매 맺는 것은 치지(置之)하고도 꽃에는 꽃만으로의 값이 있지 아니하냐. 남편은 나를 잊고 우리만 알 때에 아내는 나를 생각하게 생긴 것도 조화의 묘가 아닐까. 만일 아내가, 어미가 저를 잊고, 제 집, 제 자식, 제 서방을 잊고 다닌다면 집안이 꼴이 될 것인가-이렇게 숭은 제가 지금까지 가지고 있던 여자관, 아내관을 정정도 해보았다.
이렇게 제 생각을 다 정정해 놓고 보면 정선에게는 미워할 데는 없고 오직 그립고 사랑스럽기만 하였다. 그뿐더러,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정선을 제게서 독립한 다른 개체라고 생각하지 아니하고 부부란 신비한 화학적인 작용으로 결합된 한 몸이라는 숭 본래의 부부관과 일치하는 것 같았다.
숭은 미친듯이 일어나서 정선의 베개를 내려 그 약간 때묻은 데에 코를 대고 정선의 향기를 맡았다. 그리고는 벽에 걸린 정선의 옷을 벗겨서 향기를 맡고 또 가슴에 안았다.
"영감마님 주무세요"?
하고 유월이가 문 밖에서 불렀다.
"오, 일어났다."
하고 숭은 안고 있던 아내의 옷을 얼른 한편 구석에 밀어놓았다. 그리고 일어나서 문을 열었다. 찬란한 광선이 방안으로 물결처럼 몰아 들어왔다.
유월은 편지 두 장을 숭에게 주었다. 그리고 방에 들어와서 닫은 창을 다 열어놓고 자리를 걷었다. 숭은 유월이가 주는 편지를 받아서 겉봉을 뒤적거려 보았다. 둘이 다 정선의 이름으로 온 것인데, 하나는 "玄"이라고 편지한 이의 이름을 써서 그것이 현 의사에게서 온 것인 줄을 알 수 있으나 하나는, 뒤 옆에도 보낸 이의 이름이 없었다.
숭은 무슨 심히 불쾌한 예감을 가지고 보낸 이의 이름 없는 편지부터 떼었다. 그것은 대단히 난잡한 글씨였고 말은 글씨보다 더욱 난잡하였다. 그리고 끝에는 독일 말로 다이너(Deiner=네 것)이라고 썼다. 그리고 그 내용은 이러하다.
"내 정선이
인제는 내 정선이지. 나는 어젯밤 오류장 왕복에 감기가 들어서 앓고 누웠소. 열이 나오. 열이 나더라도 오늘밤에는 꼭 가려고 했는데 하도 몸이 아파서 못 가오. 정선의 부드러운 살이 생각나서 못 견디겠소. 이 편지 받는 대로 좀 와 주시오. 숭이놈이 일간 올라온다니 좀 대책을 의논할 필요가 있소. 숭이놈을 죽여버릴까. 그놈이 염병을 앓다가 죽지 않고 왜 살아났어. 꼭 와! 안 오면 내 정선이 아니야!"
이런 편지였다.
숭은 앞이 캄캄해짐을 깨달았다.
"그러면 엊그제 밤 자동차로 가던 것은 분명히 갑진이와 정선이로구나! 그들은 그 길로 오류장에를 갔구나!"
숭의 가슴에 북받쳐 오르는 분노의 불길-그것은 피를 보고야 말 것 같았다.
유월은 숭의 낯빛이 변하고 팔이 떨리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숭에게 준 편지가 무슨 편지인 것을 짐작하고(그는 글을 모른다) 몸에 소름이 끼쳤다.
유월의 시선이 제게 있는 줄을 안 숭은 얼른 감정을 진정하려고 애를 썼다. 그래서 편지를 접어서 예사롭게 도로 봉투에 집어넣고 현 의사의 편지를 떼었다.
"사랑하는 동생!
어제 네 태도와 묻던 말이, 너를 돌려보내 놓고 생각하니 심상치 아니하다. 내가 곧 따라 가고도 싶었으나 환자 집에 불려서 밤늦게 돌아와서 못 가고 이 편지를 쓴다. 만일 난처한 일이 있거든 이 편지 보는대로 즉시 오너라"
숭은 이 편지도 접어서 도로 봉투에 넣었다.
숭은 아찔아찔해지는 것을 억지로 참으면서,
"세숫물 다오."
하고 유월을 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