숭은 잔을 들었다. 산월은 따랐다. 숭은 술을 받아서는 도로 놓았다.

 

산월이란 누군가. 여러 번 보던 여자다. 숭과 산월이 서로 의아해하는 양을 보고 강 변호사는,

 

"허, 재자가인이 벌써 의기가 서로 합하였군. 자 허군, 감빠이(일본말로 잔을 비인다는 뜻), 축하하오, 하하하하. 산월아, 너 이 허 변호사 영감 잘 섬겨라. 그러기로 이놈아 고만 한번 보고 반한단 말이냐? 하하하하."

 

하고 좋아라고 손에 든 술을 흘리고 앉았다.

 

"원래 재자가인이란 천정한 연분이 있거든."

 

하고 임 변호사가 아주 시치미를 떼고 설명을 한다.

 

"아냐요."

 

하고 산월은 수삽한 빛을 보이며,

 

"내 이 영감을 여러 번 뵈었답니다. 학생복 입으신 때에 뵙고는 처음이 되어서 누구신가 했지요."

 

하고는 비로소 기생의 직업적 태를 내어서, 숭을 향하여 방끗 웃으며,

 

"영감, 저를 모르셔요. 제가 학교에 다닐 적에 가끔 부인한테 놀러 갔었답니다. 영감 뵙고 인사한 적은 없지만두."

 

하는 것은 상냥스러운 서울말이었다.

 

숭은 고개를 끄덕끄덕하였다. 기억이 살아나온 것이었다. 말을 듣고 보니 산월은 윤 참판 집에서 여러 번 본 여자다.

 

그때로 말하면 숭은 행랑에 있는 허 서방이다. 상전댁 작은 아씨 찾아오는 아가씨를 감히 거들떠 보지도 못할 때였다.

 

"허, 산월이, 그런 줄은 몰랐더니 양반 기생이로구나. 학교에 댕겨서 학식이 갸륵한 줄은 알았다마는, 게다가 문벌까지 금지옥엽인 줄은 몰랐단 말야."

 

하고 강 변호사는 연해 잔에 술을 흘리면서 유쾌하게 지껄였다.

 

"자 산월아, 옜다 술이나 한 잔 받아 먹어라."

 

하고 강 변호사는 잔을 준다.

 

"황송합니다."

 

하고 산월은 술잔을 받는다. 강 변호사는 손수 산월의 잔에 술을 쳤다.

 

산월은 그 술을 죽 들이켰다.

 

"아만이 언니, 웬 일이요"?

 

하고 어린 기생이 산월이 술 먹는 것을 보고 놀란다.

 

산월은 위스키 한 잔을 다 마시고 나서 잔을 강 변호사에게 돌리며,

 

"얘, 나도 좀 취해야겠다."

 

하고 갑자기 취한 모양을 보였다.

 

"산월이가 기생 나온 지 불과 반년이지마는 당대 명길새."

 

하고 강 변호사가 임 변호사를 보고 하는 말인지, 허 변호사를 보고 하는 말인지, 또는 기생들을 보고 하는 말인지 모르리만큼 한마디는 이 사람에게 주고, 다음 마디는 다음 사람에게 주어가며 산월이 선전을 한다.

 

"산월이 얘는 본대 서 장로라고 하는 유명한 장로님의 딸이어든. 보통학교, 고등보통학교, 고이 마치고, ○○학교에도 이태나 다니다가 깨달은 바 있어서 기생이 되었단 말이다. 이년들, 너희들과는 다르단 말이다."

 

이제 와서는 말끝이 기생들에게로 간 것이었다.

 

강 변호사는 다음에는 숭을 향하고,

 

"일본말 잘하고, 영어 잘하고, 글씨 잘 쓰고, 피아노 잘 치고, 노래 잘하고, 얘들아, 산월이가 또 무얼 잘하니? 옳지옳지, 인물 잘 나고, 말 잘하고, 맘 매섭고, 또 산월이 흠은 무에더라, 응? 오 옳지, 안차고 새차고 하하하하. 고놈 묘하게 생겼지."

 

밤은 더욱 깊어가고 술은 더욱 취하여 간다.

 

산월이가 화제의 중심이 되어버리는 것을 본 다른 두 기생은 뒤로 물러 앉았다.

 

숭은 차차 머리속이 희미해 오는 것을 깨달았다. 자기의 사상과 행동의 자유를 절제하던 모든 줄이 끌러진 것같이 생각되었다.

 

똑바로 앉던 것을 사방침에 기대기도 하였다. 다리도 뻗어보았다.

 

기생의 손도 쥐어보았다.

 

산월이도 술이 취하여 숭의 어깨에 머리를 놓고 기댈 때에 숭은 고개를 돌려서 산월의 머리 냄새도 맡아 보았다.

 

그 등도 한번 쓸어보았다. 숭은 비로소 술의 힘이란 것을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