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순은 이 말에 대답하기 전에, 그저께 식전 차를 타러 떠날 적에 가방을 들고 주재소 앞 큰길까지 나아간 자기를 숭이가 어깨를 껴서 정답게 한번 안아주며,
"내 갔다올께."
하고 손을 꼭 쥐어주던 것이 생각나서 낯이 붉게 됨을 깨달았다. 이것은 처음 되는 일이었다. 그 아내 정선에게 충실하여 유순의 손길 하나 건드린 일이 없던 허숭이가 어찌하여 유순에게 이만한 친절을 보였을까? 그것은 다만 먼 길을 떠나는 작별일까. 또는 아내 되는 정선에게 대한 의심과 불만이 숭에게 남편으로서 받는 도덕적 제한을 늦추어준 것일까. 또는 진정으로, 다만 털끝만한 발표도 없이 숭에게 바치는 순의 뜨거운 사랑에 대한 대답을 작별의 순간, 춥고 어둡고 감회 많은 순간에 잠깐 드러낸 것일까.
"별말씀 없으셨셔요. 어디 무슨 말씀 하시나요."
하고 유순은 정선에게 속 뽑히지 아니할 차비를 한다.
"그 전날 무슨 편지 안 왔어"?
하고 정선은 숭늉에 밥을 만다.
"편지가 왔던가 보아요."
하고 순은 대수롭지 아니한 것같이 대답한다.
"무슨 봉투? 서양 봉투, 일본 봉투"?
하고 정선은 중요한 단서나 잡은 듯이 밥술을 대접에 걸쳐놓고 묻는다.
"서양 봉툰가 보아요."
"그래. 선생님이 그 편지를 보시고 무어라대"?
"전 자세히는 못 보았어요. 허지만 나중 보니깐 그 봉투가 온통 조각조각 찢어졌어요."
"그래, 그 찢어진 것 어디 있니"?
"아궁이에 넣어서 태워버렸죠. 태워버리라고 하시는 걸요."
"한 조각도 없어, 요만큼도? 글자 한 자라도 붙어 있으면 좋으니."
하고 정선은 애가 탔다. 그것이 뉘 편지인가, 아무렇게 해서라도 알고 싶었다.
"없습니다. 다 태운걸요."
하고 유순은 뚝 잡아뗐다.
"그래두우 나가 찾아보우, 혹시 한 조각 남았나, 어여."
하고 정선은 정답게 유순을 졸랐다.
유순은 부엌에 나가서 종이조각을 찾아보았다. 있을 리가 있나? 하고 유순은 다시 방으로 들어와서,
"없어요."
하고 보고하였다.
"잘 찾아보아."
하고 정선은 유순이가 마치 찾을 수 있는 것을 일부러 아니 찾기나 하는 듯이 좀 화를 내었다. 그는 오래간만에 남편의 집에 오는 즉시 웬 찢어진 종이조각을 찾느라고 안달하는 것이 어떻게 우스운 것인지는 미처 생각하지 못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