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선은 현 의사한테로부터 집에 돌아오는 길로 짐을 싸가지고 오후 일곱시 특급을 타고 남편 허숭이 있는 살여울을 향하였다. 정선은 현이 어떤 여자더러, "남편한테로 가구려"하던 말대로 실행하려 한 것이었다.
정선은 한잠도 이루지 못하고 살여울 가는 정거장에서 하나 더 가서 읍내 정거장에서 내렸다. 아직 캄캄하였다. 특급차는 작은 정거장엔 정거를 아니하는 까닭이었다. 정선은 아직도 자고 있는 자동차부를 깨워 일으켜서 아니 간다는 것을 제발 빌어서 이십 리 남짓한 살여울을 십원이라는 엄청난 값으로 자동차를 세내어 타고 살여울로 향하였다.
살여울을 다 가도 아직 해가 뜨지 아니하였다. 칠백 리나 서북으로 온 이 지방은 서울보다 대단히 추웠다. 정선은 슈트케이스를 이 손에서 저 손으로 옮겨들어가면서 촌락 가운데 길을 피하여 달내강가로 더듬어 바로 남편의 집 허숭의 집으로 걸어갔다. 그래도 귀밝은 동네 개들은 정선의 구둣자국 소리를 알아듣고 한두 마디 짖었다.
정선은 남편과 작별하기 전에 가끔 나와 앉았던 강언덕에 짐을 놓고 좌우 가에 반이나 살얼음이 지핀 강을 들여다보면서 그때 일을 회상하였다.
남편의 집은 새벽빛에 싸여 남빛에 가까운 자줏빛으로 보였다. 정선은 죄짓고 쫓겨났다가 빌러 들어오는 며느리 모양으로 짐을 들고 언덕길을 추어올랐다. 새로 판 우물가에는 오지 자배기에 두부와 고비가 맑은 물에 담기어 놓인 것이 보였다. 정선에겐 그런 것이 다 다른 세계 것같이 보였다.
정선은 무심코 우물을 들여다보았다. 컴컴한 우물 속에는 손바닥만한 빛 받은 물이 수은빛으로 흔들렸다. 마치 정선의 입김에 물결이 지는 것 같았다. 정선은 그것이 형언할 수 없이 신비한 것 같고 무서운 것 같았다. 서울 생장인 정선은 우물을 들여다본 일이 없었거니와, 우물이 정선에게 주는 비상한 감동은 오직 이 <처음 봄>만은 아니었다. 마치 예수교의 세례에 사람의 머리에 떨구는 물 몇방울이 그 사람에게 큰 정신적 감동을 주는 것과 같은, 지금 당장은 설명할 수 없는 감동을 주었다.
정선은 차마 여기서 더 갈 용기는 없었다.
"내가 아무 일 없이 남편을 찾아왔다 하면, 얼마나 호기스럽고 자랑스러울까."
이렇게 생각하면 앞이 캄캄하였다.
"내가 무엇하러 여기 왔나? 내 죄를 숨기려고, 남편과 세상을 속이려고 온 것이 아니냐."
하면 땅에 쓰러질 것 같았다. 정선은 우물 기둥을 붙들고 몸을 지탱하였다.
불끈 솟는 해-먼지와 연기 없는 깨끗한 대기 중에 해는 잠 ?6.59깨, 혈색 좋은 어린애가 고개를 번쩍 드는 것 같았다. 누런, 신선한 햇빛이 우물 기둥에 기대어 괴로와하는 정선의 몸을 비추었다. 그것은 한폭 그림이었다.
우물에서도 수십 척이나 되는 언덕을 올라가야 남편의 집이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남편의 집은 보이지 아니하였다.
정선은 또 우물을 들여다보았다. 손바닥만하던 흰 점은 커져서 환하게 열린 수면이 정선의 얼굴을 비추고 있었다. 정선은 제 그림자를 무서워하는 듯이 흠칫하고 뒤로 물러섰다.
딸그락딸그락 하는 소리에 고개를 돌린 정선은 물동이를 들고 내려오는 순이를 보았다.
"아이그머니!"
하고 유순은 화석과 같이 우뚝 섰다. 그는 하도 놀라서 그 이상 더 말이 나오지를 아니하였다.
정선도 숨만 씨근거릴 뿐이요, 말이 나오지를 아니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