억압인가. 질투인가.
정선에게나 유순에게나 이 자리는 유쾌한 신(장면)은 아니었다. 미움, 분함에 가까운 감정이 거진 같은 날카로움으로 마주선 두 여자의 가슴을 폭폭 찔렀다. 겨울 아침다운 싸늘한 광경이었다.
"아이그, 너 얼마나 애를 썼니"?
먼저 이 괴로운 적막을 깨뜨릴 소임은 정선이가 할 수밖에 없었다. 정선은 어른, 주인아씨, 교육과 지위 높은 사람이라는 우월감을 억지로 회복해서 입을 연 것이다.
"그동안 아무 일 없었니"?
하고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
"언제 오셨어요"?
시골 계집애인 유순의 입에서는 이 이상의 예절다운 말은 나올 수가 없었다. 그리고 물동이를 발 앞에 내려놓았다.
"선생님 안녕하시냐. 아직 주무시니"?
하고 물을 때에 자기가 남편을 찾은 목적이 얄미운 짐승 모양으로 자기와 유순의 앞으로 날름거렸다.
"에그, 못 만나셨네."
하고 유순은 다시 놀라는 표정을 하였다.
"응"?
하는 정선의 가슴은 쌍방망이질하는 듯하였다.
"그저께 아침차로 서울로 올라가셨는데."
하고 유순은 가엾어하는 듯이 정선을 보았다.
"무어? 그저께 아침차"?
"네. 그저께 아침차요."
"어제 아침 차 아니구"?
"아냐요. 그저께가 장날인데 아침차로 떠나셨는데."
하고 순은 알 수 없는 일이다 하는 눈을 짓는다.
정선은 그만 슈트케이스 위에 쓰러져 울었다. 몸부림이라도 칠 듯이 울었다.
"무얼요, 선생님 내려오신 줄 아시면, 곧 돌아서서 오실걸요."
하고 정선이가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아니하는 남편을 찾아 허위단심으로 밤차를 타고 왔다가 남편을 못 만나서 우는 것으로만 생각하고, 유순은 눈물이 쏟아지도록 동정하는 맘이 생겼다. 지금까지 가슴에 있던 질투의 그림자조차 다 스러지고 말았다.
"들어가세요, 추운데."
하고 유순은 가만히 정선의 팔을 잡아끌었다.
정선은 반항하지 아니하고 유순에게 끌려 일어났다. 유순은 물동이를 우물가 물동이 자리에 놓고, 정선의 짐을 들고 앞을 서서 언덕길을 걸어올라갔다. 정선도 그 뒤를 따랐다. 장쾌한 아침 햇빛이 잎 떨린 나무 사이로 걸어가는 두 여자를 고동색 언덕빛과 조선에서만 보는 쪽빛 하늘 배경 앞에 그려내었다. 그러나 어두운 정선의 가슴에서 솟는 검은 눈물은 막을 수 없이 앞을 가리었다.
한갑 어머니가 부엌에서 새벽 동자를 하다가 반색을 하고 나와서 정선을 맞는다. 정선은 괴로움으로 찌그러지고, 눈물로 젖은 낯에 억지 웃음을 지어서 한갑 어머니의 인사에 대답하였다.
아아 남편의 방! 정선은 남편의 방에 들어간 아내다! 칠도 아니한 책상, 책장, 미투리 삼는 신틀, 벽에 걸린 옥수수, 조이삭, 허울 좋은 수수이삭, 탐스러운 벼이삭, 입다가 둔 광목옷들. 서울집의 허숭 내외의 침실과는 이상한 대조다.
정선의 눈은 방안을 두루 돌다가 책상 머리에 붙여놓은 사진을 보았다. 그것은 정선의 사진이었다. 자기가 남편을 잊고 있던 동안에 남편은 날마다 이 사진을 보고 자기를 생각하던 것을 생각하니 슬펐다.
정선은 책상 위에 놓인 공책을 열었다. 그것은 시골 보통학교 아이들이나 쓰는 연필 공책이었다.
"시월 ○일. 오늘도 아내에게 편지가 안 온다."
"시월 ○일. 오늘은 동네 길 역사를 하였다. 다들 재미를 내고 열심하는 것이 기뻤다. 내일은 우물을 치고, 우물길을 수축하기로 작정하였다. 이 모양으로 살여울은 날로 새로와 가고, 힘 있어 가는 것이다. 살여울은 곧 조선이다."
"그런데 왜 우리 정선에게서 편지가 없을까"?
이러한 구절도 있었다.
정선은 남편의 일기책을 더 뒤져보았다.
"십일월 ○일. 춥다. 쌀값이 오른다고 기뻐들 한다. 협동조합 저리자금이 있었기에망정, 그것이 아니더면 이 동네 사람들도 싼 시세에 다 팔아버렸을 뻔하였다. 이 동네 부자들도 조합에 들어 주기만 하였으면 좋으련마는, 자금 부족도 없으련마는, 그렇지마는 최후의 승리는 우리에게 있다."
"도무지 웬일인가. 정선이가 병이 났나. 퍽 그립다."
또 얼마를 지나가서는,
"그럴 리가 없다. 그의 말은 못 믿을 말이다. 남의 아내를 의심케 하려는 비루한 반간이다!"
라고 쓴 것이 있다. 글씨도 크게 함부로 갈기고 또 어느날이라는 날짜도 아니 적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