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진이가 대문 소리를 요란히 내고 나가버린 뒤에 정선은 정신 없이 쓰러져버리고 말았다. 우는 유월이는 정선이의 머리에 베개를 베우고 이불로 정선을 덮어주었다. 정선은 그것도 모르는 듯하였다.
정선이 일어나 세수를 하고 밥 한술을 뜬 것은 오후 네시가 넘어서였다.
정선은 그래도 밖에 나가는 단장을 할 정신은 있었다. 그것은 여자의 본능으로였다. 머리도 빗고 분도 발랐다. 그리고 옷도 갈아입었다. 그가 양복장을 열고 갈아입을 옷을 고르려 할 때에 어젯밤에 입었던 자주 저고리와 고동색 치마를 보고는 그것을 찢어버리고 싶었다. 정선은 양복을 입을까 하다가 그것도 귀찮다 해서 그만두고 검정 세루 치마에 흰 저고리, 눈에 아니 뜨이는 옷을 입고, 게다가 검정 나단 두루마기를 꺼내 입었다. 옷을 입고 체경에 비추어볼 적에 자기의 얼굴의 아름다움이나 의복의 아름다움이나 모두 허사요, 귀찮은 것만 같이 생각되었다.
정선은 이 모양을 하고 집에서 나와서 정동 성공회 앞을 걸어서 다방골 현 ○○이라는 여의의 병원으로 향하였다.
성공회 교당 꼭대기에 선 십자가가 석양의 하늘에 파스텔로 그린 그림 모양으로 정선의 눈에 보였다. 정선이는 성공회 속에 사는, 검은 장삼 입고 흰 고깔 쓴 수녀들을 생각하였다. 그 싸늘하고 적막한 생활로 일생을 보내는 수녀들의 심정이 좀 알아지는 것 같이도 생각하였다. 그 수녀들도 다 자기와 같은 과거를 가진 사람들이 아닌가 하였다.
<성공회(聖公會)>라고 흰 글자로 크게 쓴 문패, 문 안으로 엿보이는 조용한 마당과 집들, 모두 죽음의 고요함을 연상시키는 것 같았다. 저러한 속에서 찬미와 기도와 회개의 눈물로 일생을 보내는 수녀들이 그립기도 하여 들어가보고 싶었다. 예전 같으면 수녀원 같은 것은 거들떠보지도 않던 것, "피이" 하고 비웃던 것, 그런 것이 자기의 흥미를 끌고 관심을 끄는 데에 정선은 스스로 놀라지 아니할 수 없다.
"죄인에게 종교."
라는 어디서 들은 구절이 가슴을 찌른다.
"아이, 정선이로구나."
하고 힘없이 걸어가는 정선의 어깨를 치는 사람이 있었다.
"응"
하고 정선은 돌아섰다. 그들은 자기와 동창인 석 ○○, 여 ○○ 두 여자였다.
"아이구머니나."
하고 석이 정선의 차림을 보고 놀라는 듯,
"너 이 꼴을 하고 어딜 가니? 꼭 자다가 쫓겨난 며느리 같구나. 어디 남의 집 살러 가는 침모도 같고. 글쎄, 부잣댁 마님이 이게 웬일이냐"?
하고 혼자 웃어댔다.
정선도 부득이하여 빙그레 웃기는 하면서도, 석의 농담의 말이 모두 마음에 찔렸다.
"어딜 가우"?
하고 여도 반가운 듯이 손을 잡으며 물었다. 그는 방글방글 웃는, 수줍어하는 여자다.
정선은 힘없이,
"나, 저, 다방골."
하고 아무리 불편한 빛을 안 보이려 하여도 정선이 땅 밑으로만 가라앉았다.
"너 어디 아프냐"?
하고 석이 정선을 껴안으면서 걱정스럽게 묻는다.
"아니."
하고 싱긋 웃었다.
"허 선생은 언제나 오시오"?
하고 여가 묻는다. 여와 석은, 바로 전에 정선의 이야기를 하던 끝이었다. 정선이가 허숭과 이혼을 한다는 둥, 하였다는 둥, 갑진이와 관계가 있다는 둥, 같이 산다는 둥, 동무들간에는 이야깃거리가 되어 있는 까닭이었다. 그런 이야기를 듣던 끝에 정선의 모양이 수상한 것을 보니 두 동무는 의심과 호기심을 일으키게 된 것이었다.
정선은 여의 묻는 말에,
"모르지요."
하고 웃음 섞여 대답할 뿐이었다.
"얘, 저어."
하고 석은 농담도 다 제쳐놓으면서 말을 내기가 어려운 듯이,
"저어, 세상에는 이야기가 많더라. 네가 이혼을 한다느니, 또 머 별말 다 많지. 우리야 그런 소리를 다 믿겠니마는, 그야 안 믿지, 안 믿기는 하지만두, 저어, 그이 말이다, 그 저 김갑진인가 한 이하고 이러쿵저러쿵 말이 많더라. 말없는 것만은 못하거든, 그 말이 허 선생 귀에라도 들어가면 안됐지."
하고 정선의 눈치를 보았다.
정선은 석, 여 두 동무가 자기의 비밀을 죄다 알고 못 견디게 구는 것만 같았다. 그 둘의 눈이 무섭고 입이 무서웠다. 정선이 두 동무의,
"우리 저녁에 가마."
하는 작별의 말을 듣고 부청 앞을 향하고 걸어갈 때에는 그 두 동무가 뒤에서 자기를 향하여 손가락질하고 비웃는 것만 같았다. 그래 힐끔 뒤를 돌아볼 때에는 두 동무의 모양은 벌써 어디론지 사라지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