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은 무엇을 생각하는지 가만히 눈을 감고 있다가, 정선의 한숨 소리에 눈을 번쩍 떠서 그 맑은 눈으로 정선의 고부슴히 숙인 낯을 흘끗 본다. 그리고 두어 번 눈을 감았다 떴다 한다. 정선의 한숨과, 낯빛과, 자세와, 이 모든 낱낱의 재료에서 무엇을 귀납하려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혼자 다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끄덕하고는 담배 한 모금을 길게 빨아들이고 식지 끝을 들어서 궐련에 생긴 재를 톡톡 떨어버린다. 하얀 에나멜 재떨이에 재가 떨어져 흩어진다. 현은 마치 여름 하늘이 금시에 소낙비 구름에 흐리는 듯이 멜랑콜릭하게 변한다.

 

두 사람 새에는 말이 없고 현이 빨기를 잊어버린 궐련 연기만이 여러 가지 파란 모형을 그리면서 올라서 스러진다.

 

복이가 쟁반에 김나는 차 두 잔을 들고 들어온다. 불그레한 홍차다. 쟁반 위에는 모사탕 그릇과 크림 그릇과 은 찻숟가락이 놓였다. 순 서양식 차제구다.

 

현은 벌떡 일어나면서 삼분지 일이나 남은 궐련을 재떨이에 비벼서 꺼버리고,

 

"정선이, 자, 차나 먹어."

 

하고 자기가 먼저 자기 잔에 사탕과 크림을 타서 저어서 한 입을 마신다.

 

"정선이 무슨 걱정이 생겼어"?

 

하고 현은 한 팔을 테이블 위에 세워서 턱을 괴고 물끄러미 정선을 쳐다본다. 그러나 그 눈은 아까 보던 맑은 눈이 아니라 슬픔에 찬, 젖은 듯한 눈이었다.

 

"아니."

 

하고 정선은 분명히 부인하고 그 부인한 것을 증명하기 위하여 상긋 웃었다. 현은 정선의 부정을 믿지는 아니하면서도, 남의 속을 억지로 알아내려고는 아니하였다. 다만 정선의 가슴에 근심과 슬픔의 새로운 그림자가 있는 것만은 아니 볼 수 없었다.

 

"언니."

 

하고 정선은 교의를 현의 옆으로 바짝 잡아당기고,

 

"언니, 내가 애를 낳기가 싫은데, 어저께 남편이 다녀갔으니 어떡하면 애를 안 배게 할 수가 있을까."

 

하고 주홍빛이 되도록 낯을 붉혔다.

 

"아, 하하하."

 

하고 현은 사내 너털웃음을 웃었다.

 

정선은 더욱 부끄러워서 현의 다리를 꼬집으며,

 

"응, 왜 웃어."

 

하고 항의하는 어리광을 부렸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다 정선의 맘을 폭폭 찌르는 듯하였다.

 

"아야, 아야."

 

하고 현은 여전히 웃으며,

 

"네 말에 웃는 것이 아니라, 오늘 왔던 환자 생각이 나서 웃는 거야. 네 말을 들으니까 꼭 그 사람 생각이 나는구나, 아하하 허허."

 

하고 유쾌하게 웃는다. 현에게서는 멜랑콜리의 구름이 걷혀버렸다.

 

"무슨 환자야? 응, 어떤 환잔데 그렇게 웃으시우"?

 

하고 정선이 역시 멋없이 따라 웃는다.

 

"내 말 들어봐라."

 

하고 현이,

 

"바루 아까 어떤 젊은 병자 하나가 왔단 말이다."

 

"나 올 그때에"?

 

"응, 그게 그 사람인데. 인물도 잘 생겼어요. 살결이 희고 몸이 좀 육감적이지마는, 허기야 사내들의 맘에 들게 생겼길래 문제가 일어날 것이지마는. 그래 무슨 병이요 하니까, 꼭 네 병과 같은 병이어든. 글쎄, 그렇게 신통방통한 일이 어디 있니? 내 우스워."

 

정선은 외면한다.

 

"아, 그래 어찌 된 일이냐고 물었지."

 

하고 현은 말을 잇는다.

 

"처음에는 무에라고 부득 요령한 소리를 주워댄단 말야. 시도로모도로(일본말로 어름어름이라는 뜻)지. 그렇지만 내게 걸려서야 제가 배기나. 그만 울고 실토를 해버린단 말이다."

 

하고 침을 한번 삼키고,

 

"어떤 교사의 아낸대, 남편이 한 달 전에 어느 시골을 갔대. 그런데 어떤 남자의 유혹으로-저는 강제라더라마는 무에 그럴라구-어쨌든 어젯밤에 훼절을 했다거든. 그러니 애기가 들었으면 어쩌느냐 말야, 제발 날더러 애기가 아니 배게 해달라는구먼. 그래 밉살스런 양해서는 "여보, 남편 있는 이가 한 달 동안을 못 참아서 남의 사내하고 애밸 짓을 해놓고는 누구더러 애기를 아니 배게 해달라오" 하고 싶었지마는, 거기는 또 의사의 도덕이 있단 말이다. 도적놈이거나 서방질한 년이거나 그것은 물을 것이 없단 말야. 내 원."

 

하고 현은 남은 차를 마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