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선은 감시하는 눈을 벗어난 죄인 모양으로 걸음을 빨리 걸었다. 정선은 아직 혼인 아니한 두 처녀의 순결함, 자유로움이 부러웠다. 자기는 거기 비기면 마치 때 묻은 옷, 부스럼 난 몸, 더러운 오라로 얽힌 꼴같이 생각켰다. 내가 세상에 제일 잘나고 제일 행복된 사람이라고 자긍하던 것이 어제 같건마는.

 

다방골 천변으로 들어서서 소광교를 향하고 천변을 내려가느라면 조선집을 반 양제로 꾸민 집이 있고, 거기는 <婦人科, 小兒科>를 두 줄로 갈라 쓰고, 그 밑에 큰 글자로 <○○醫院(의원)>이라고 쓰고, 또 곁에는 <院長 ○○醫學士 玄○○(원장 ○○의학사 현○○)>라고 좀 작은 글자로 쓴 현판이 걸렸다. 그 현판의 중간 이하에 물이 난 것이 이 병원이 선 지 여러 해 된 것을 보였다.

 

대문 안에는 인력거 하나가 서 있었다.

 

정선은 사랑채인 병원으로 아니 들어가고 안대문으로, 따라오는 사람이나 피하려는 듯이, 빠른 걸음으로 들어갔다.

 

"언니!"

 

하고 정선은 안마루 유리 분합 앞에서 불렀다.

 

마당도 넓고 깨끗도 하고 꽤 큰 집이언마는 식구가 없어서 조용하였다.

 

정선의 소리에 건넌방 문이 열리며 열 댓 살 된 계집애가 내다보고,

 

"아이 오셔겝쇼? 선생님 지금 병자 보십니다."

 

하고 분합을 열고 맞아준다. 여의 현 ○○는 하인들로 하여금 아씨니 마님이니 하는 말을 못 쓰게 한다. 그러므로 하인들은 현을 선생님이라고 부른다.

 

정선이 구두를 끄르고 올라오는 동안에, 계집애는 사랑으로 통하는 일각문으로 댕기꼬리를 나풀거리며 쪼르르 뛰어나간다.

 

정선은 마루에 놓인 등교의에 몸을 던졌다.

 

<아이, 그 말을 어떻게 묻나?>

 

하고 집에서 몇시간이나 두고 하였던 생각을 또 되풀이한다.

 

정선이가 현 의사에게 물으려는 것이 무엇인가.

 

계집애가 나간 지 얼마 되지 아니하여 현이 들어온다.

 

현은 머리를 물결이 지게 지지고 자주빛 좀 짙은 듯한 양복을 입었다. 얼른 보기에는 이십이 될락말락한 처녀 같지마는 가까이 보면 얼굴에 삼십 넘은 빛이 보였다.

 

현은,

 

"어 정선군 왔나"?

 

하고 사내가 사내에게 대해 하는 어조를 흉내낸다. 현에게는 이런 버릇이 있었다.

 

"하우 두 유 두"?

 

하고 현은 역시 사내 모양으로 정선의 손을 잡아 흔들고, 그리고는 남자가 제 애인에게나 하는 모양으로 정선을 한번 껴안고, 그 이마에 키스를 하고, 그리고는 담요를 덮어놓고 눕는 교의에 턱 드러누워,

 

"복아, 담배 가져온!"

 

하고 명령한다. 그 어조는 여자다.

 

"그래."

 

하고 현은 청지연 한 개를 피워 맛나는 듯이 연기를 내어뿜으며,

 

"에니 뉴스(무슨 새 소식 있나)? 그 어른 아직 안 올라오셨나. 대관절 우리 정선이같이 꽃같은 마누라를 두시고 무얼 하고 안 올까. 나 같으면 산보를 나가도 꼭 데리고 다니겠네."

 

하고 뚫어지게, 귀여운 듯이 정선을 바라보며, 스며드는 연기를 피하느라고 눈을 한쪽씩 감았다 떴다 하며,

 

"참, 내 동생이 예뻐. 언제 보아도 예쁘지마는 오늘은 특별히 더 예뻐. 무슨 좋은 일이 있었나봐. 네 남편 올라오셨구나, 그렇지"?

 

하고 담배 연기를 일부러 정선에게로 불어 보낸다. 정선의 코에 그 부드러운 향기가 들어오는 것이 싫지 아니하였다.

 

"나도 담배나 한 대 먹을까"?

 

하고 정선은 파란 레텔로 싼 동그란 드리캐슬(청지연) 통을 물끄러미 보고 앉았다. "좋은 일이 있었느냐, 남편이 왔느냐" 하는 현의 말에 가슴이 뜨끔하였다. 현도 내 속의 비밀을 들여다보는가 하여 무서웠다.

 

그러나 정선은 얼른 대답하였다.

 

"응, 그이가 왔다 갔어."

 

하고 정선은 빙그레 웃었다. 그리고 수 났다 하는 생각과, 아아 거짓말장이 하는 생각이 풀숲에서 나오는 양두사 모양으로 일시에 고개를 들었다.

 

"왔다 가셨어"?

 

하고 현은 놀라는 표정을 하며,

 

"아 그래, 나도 한번 안 보고 갔어? 오, 나한테 네 남편 뺏길까봐서 네가 나를 따돌리는구나."

 

하고 깔깔 웃더니,

 

"아니 그런 게 아니라, 내가 네 남편한테 물어볼 말이 있었는데. 다른 변호사한테는 가기 싫고."

 

하고 유감이라는 듯이 고개를 살래살래 흔든다.

 

"또 온대."

 

하고 정선은,

 

"고등법원에 무슨 소송사건이 있다나, 해서 또 수이 온답데다. 그때도 늦지 않거든, 그때에 물어보시구려."

 

하고 아침에 받은 남편의 편지, 그것을 읽을 때의 광경 등등을 생각하고 휘유 한숨을 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