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선은 얼마를 혼자 몸부림을 하고 발버둥질을 하고 울다가 이불 위에 떨어진 허숭의 편지를 찾아서 들고 일어나 앉았다. 그리고 편지 겉봉을 한번 더 앞뒤로 보았다. 뒤 옆에는,

 

"夫書(남편이 쓰노라)"

 

하고 이름이 씌어 있다. 그 지아비 붓자의 모든 획이 날카로운 칼이 되어서 정선의 온 몸을 찌르는 것 같았다.

 

정선은 그 편지를 떼었다. 거기에는 이렇게 써 있다.

 

"사랑하는 내 아내여"

 

를 허두로 하고, 허숭의 습관으로 순 한글로,

 

"올라가신 뒤로 도무지 무소식이어 궁금하오. 내가 한 두 편지는 받았을 줄 아오. 나는 정선이 갈 때에 비겨 훨씬 건강해졌소. 요새는 동네 일도 대단히 바쁘오. 동네 여러분이 다 내 말을 잘 믿어 주셔서 이번 추수한 것으로 조그마한 협동조합 하나를 만들었소.

 

내게 남았던 돈 팔백 원도 전부 이 조합 기금으로 붙였소. 나는 이 협동조합이 살여울 동네 백성들에게 밥과 옷을 넉넉히 주게만 되면 내가 난 보람은 하는 것이오. 그러나 일은 이제 겨우 시초요. 시작이 절반이라고도 하지마는 다 잦힌 밥도 입에 넣어야 먹어지는 것이오. 아직 시작할 것도 많고, 또 겪어내어야만 할 어려운 일도 많소.

 

그렇지마는 나의 사랑하는 아내 정선이 나와 같이 이 일을 한다고 약속해 준 말을 믿고 나는 큰 힘과 큰 기쁨을 얻소. 나는 정선에게 부족한 것이 많은 남편이지마는 정선은 내게 사랑이 많은 아내가 되어 줄 것을 믿소. 정선은 혹 나와 순이와 사이에 무슨 애정 관계가 있는 것같이 의심하신 모양이지마는 절대로 그런 일이 없소. 예전에 순을 귀엽게 생각한 일도 있는 것은 사실이나 내 아내는 오직 정선뿐이오. 정선 이외에 아무러한 여자도 나를 사랑하지 못하고 또 내 눈이나 맘이 가지 아니할 것을 믿소. 정선도 그리 믿으시오.

 

비록 정선이 나보다 먼저 죽는다 하더라도 나는 다시 다른 여자를 사랑하지 아니할 것이오. 내가 만일 정선보다 먼저 죽는다 하더라도 정선은 나밖에 다른 남자를 사랑하지 아니할 것을 나는 믿소. 또 믿으려 하오.

 

정선! 이런 생각을 세상은 구식이라고 할는지 모르나 모든 배반과 모든 의리 없는 것을 미워하오. 나는 천하 사람을 다 사랑하고 용서할 수 있지마는, 의리를 저버리는 사람은 용서할 수는 없소. 만일 내 아내가 내게 대하여 변심하는 일이 있다 하면 나는 어찌 할까. 그러나 만일 내가 남편으로서 아내인 정선을 배반한다 하면, 그런 일이 있거든 정선은 내 심장을 칼로 찌르시오. 나는 거기 합당한 죄를 지었으니까.

 

모두 부질없는 소리를 하였소. 나는 요새 대단히 정선이 그립소. 마치 새로 연애하는 사람과 같이 맘 둘 곳이 없이 정선이 그립소. 왜 편지를 아니하시오? 요새에 날마다 무엇을 하고 있소? 아마 어서 내게로 오고 싶어서 재산 정리를 하기에 바쁜 줄 아오. 너무 애쓰지는 마시오. 아니 팔리거든 그냥 장인께 맡기고 내려오시오. 내가 기다리는 것은 정선의 몸뿐이오, 맘뿐이오.

 

만일 일 주일 안에 정선이 아니오면 나하고 같이 내려올 수 있소. 내가 우리 동네 사람들 상고 사건으로 내월 중순에는 상경하게 되겠소.

 

이 동네 여러 부인네들이 다 정선을 보고 싶어하오.

 

부디 몸 조심하고 교제를 삼가시오.

 

하고 끝에,

 

十月 二十八日 밤 정선의 崇"

 

이라고 썼다.

 

편지를 보는 동안에도 몇번이나 정선은 손으로 낯을 가리고 엎드렸다. 차마 그 다음에 쓴 글귀를 읽을 수 없는 까닭이었다. 마치 남편이 어젯밤 자기가 한 일을 다 보고 가서 자기를 책망하느라고 쓴 편지인 것 같았다.

 

편지를 다 보고나서 정선은 이불 위에 폭 엎드려버렸다. 그러나 이 때에 정선에게는 뉘우침보다도 무서움의 힘이 있었다.

 

"내가 만일 정선을 배반하거든 정선은 칼로 내 심장을 찌르시오"

 

하는 것을 생각할 때에 정선의 눈 앞에는 시퍼런 칼을 들고 선 숭의 모양이 보인 것이다.

 

바로 이 때다. 이 때에 유월이가,

 

"마님 잿골 서방님이 오셨어요." 하였다.

 

"아직 안 일어났다고 그래!"

 

하고 고개도 들지 아니하고 화를 내어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유월이가 나가기도 전에,

 

"아직 안 일어났소"?

 

하고 반말지거리를 하며 영창을 홱 열고 들어왔다.

 

"들어오지 말아요…나가요!"

 

하고 정선은 이불 위에 엎어진 채로 몸을 흔들며 부르짖었다.

 

갑진은 그런 소리는 들은체 만체,

 

"어, 이건 왜 이러오? 허기는 정선씨 그 포즈도 어여쁜데. 미인이란 아무렇게 해도 어여쁜 법이야. 아, 코대크를 가지고 올걸 그랬는걸. 얘, 유월아, 너는 나가! 왜 거기 버티고 섰어"?

 

하고 유월을 향하여 눈을 흘긴다.

 

"나가요! 왜 남이 일어나지도 않았는데 남의 방에 들어오시오? 어서 나가라면 나가시오!"

 

하고 정선은 눈물과 흥분으로 어룽어룽한 낯을 번쩍 뒤로 돌리면서 갑진을 노려보며 물어뜯기라도 할 듯이 화를 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