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감, 그런 농담은 차차 하시고 잔이나 드세요. 오래간만에 대감과 대작을 하게 되니 퍽 반갑소이다. 자, 어서 잔을 드세요."
영초의 눈짓에 기생은 흥선을 위하여 다시 권주가를 뽑아내었다.
그러나 흥선은 완강히 잔을 들지 않았다. 공복에 독한 술을 먹었기 때문에 검붉게 된 얼굴에다가 기괴한 미소를 띠고, 정면으로 영초의 낮을 바라보면서 완강히 '묘책 전수'를 요구하였다.
"게다가 나 같은 사람은 호구지책으로 변변치 않은 난초 장도 그려서 팔고, 투전판에서 뽑이도 하거니와, 대감은 그런 재간도 있다는 소문도 없으니 돈 생길 데가 없어. 그러면서 이 많은 비용을 어디서 구해내시오?"
"하하하, 대감도 농담도 너무 심하시구료."
"농담? 내가 농담이오?"
흥선은 정색을 하였다. 그리고 휙 기생을 돌아보았다.
"야, 너의 집에는 빚쟁이가 안 오느냐?"
기생도 미소하였다.
"왜 안 올 리가 있습니까?"
"와? 오면은 그럼 너는 어떻게 하느냐?"
"그러기에 이런 대감 댁에 와서 숨어 버리지 않습니까?"
"여기 숨는다? 그걸 보오. 이 댁에는 빚쟁이가 못 오게 하는 무슨 묘책이 있기에 여기 피신까지 하는 게 아니오? 자, 대감 응? 그 - 그 - 어 취한다."
휙 지독한 취기가 한번 그의 머리를 덮고 지나갔다. 그 취기 때문에 비틀거리는 몸을 그냥 팔굽으로 상에 기대고 흥선은 푹 머리를 수그렸다. 과세 비용의 걱정이 술 때문에 무섭게 확대되어 갑자기 그의 가슴을 눌렀다.
"에, 가봐야겠군!"
잠시 머리를 수그리고 있던 흥선은 갑자기 비틀비틀 일어섰다. 그러나 공복에 독한 술이 들어갔기 때문에 온몸이 마비된 흥선은, 자기의 몸을 마음대로 일으킬 수가 없었다. 반만치 일어나다가 털썩 주저앉아 버렸다.
"허허, 몹시 취했군! 내 몸이 내 마음대로 안 된담? 대감! 영초! 영초! 나 여기서 한잠 자겠소."
흥선은 몸을 번듯이 거기 눕혔다.
"한송정 솔을 베어 조그맣게 배를 무어 - 어 취한다! 우리 늙은 마누라 쌀이나 좀 바꾸어 왔나..."
흥선은 거기서 혼혼히 잠이 들어 버렸다.
그러나 거기서 혼혼히 잠은 들었으니 흥선의 잠은 오래 계속되지 못하였다. 마음속에 숨어 있는 커다란 수심 때문에, 잠이 든 지 얼마 되지 못하여 번쩍 눈을 떴다.
"으 - ㅁ!"
한 소리 기지개와 함께 흥선은 사면을 살펴보았다. 처음 한순간은 부드러운 처네와 뜨뜻한 넓은 방이 낯설었지만, 그것이 영초의 집 사랑 정침(正寢)이라는 것을 깨달으면서 흥선은 몸을 일으켰다. 일어나매 아까의 기생이 시중을 들려고 기다리고 있다가, 흥선에게 수정과 한 대접을 바쳤다.
"응, 한잠 잘 잤군! 어서 집으로 가야겠군."
흥선은 양치를 한 뒤에 자기의 의관이 어디 있는지를 살필 때에, 침방 문이 열리며 거기서 주인 영초가 나타났다.
"벌써 다 주무셨소?"
"아이구, 잘 얻어먹고 낮잠까지 자고... 이젠 가야겠소."
"왜 좀더 천천히 가시지요. 해정이나..."
말을 계속하는 것을 흥선은 가로막았다.
"해정이 다 뭐요? 어서 가야지, 집에서는 눈이 빠지게 기다릴 터인데..."
그 말을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영초는 거기에는 대답지 않고 가까이 내려왔다. 그리고 흥선이 자리를 비키려는 것을 손짓으로 막고 자기는 발치에 물러앉았다.
"가신다 해도 그 옷이 모두 구겨져서 어떻게 그냥 가십니까? 저 방에..."
영초는 손을 들어서 제 침방 쪽을 가리켰다.
"잠깐 가 보세요. 변변치는 못하나마 갈아입으실 옷을 준비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