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족의 한 사람으로 흥선도 자라서는 봉군(封君)이 되어 '군'이라는 명칭은 붙어서 흥선군이라는 명색이 있기는 있었다. 그러나 가난하고 세력 없고 그 위에 당시의 권문인 김씨 일족이며 그 밖 권도가들에게 멸시를 받고, 거리의 무뢰한들과 짝하여 술이나 먹고 투전이나 하러 다니는 그는 어디로 본든지 일개의 표랑객이지 왕족으로 보이지 않았다.

 

단지 때때로 뜻없이 호령을 할 때나, 혹은 무슨 마음에 맞지 않는 일 때문에 획 돌아서고 말 때에 그의 무서운 위압력이, 얼핏 보아서 범인이 아닌 그림자가 눈 밝은 사람에게는 보이는 뿐이었다.

 

가난한 종친, 권세 없는 왕족 - 이 주정뱅이 공자는 어두운 밤 바람 찬거리를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자기의 집으로 향하고 있었다.

 

"모레가 그믐이라, 떡쌀이나 있나?"

 

물론 없을 것이었다. 떡쌀은커녕 내일 아침 조반쌀이 있을지 없을지도 의문이었다. 아침에 부인에게 꼭 좀 마련하여 오란 당부를 단단히 받고 나온 흥선군은, 나오다가 어떤 술친구를 만나서 술친구가 끄는 바람에, 부인의 당부도 잊어버리고 어떤 기생집에서 진일을 술로써 보낸 것이었다. 그리고, 부인의 당부는 잊었던 것이었다.

 

술 때문에 얼마만큼 마음이 호젓하게 된 그였지만, 발이 집에 가까워짐을 따라서 흥그럽던 마음이 차차 무거워졌다. 그리고 마음의 무거움은 발로 전염되어 발의 걸음도 차차 무거워졌다.

 

"우--위! 취하는군!"

 

타성으로 다시 한번 트림을 하면서 이렇게 중얼거렸지만, 아까 개의 사건과 차차 가슴을 무겁게 하는 근심에 취기도 꽤 깨었다.

 

금옥낭청에 운학선은 바라지 않는 바다. 그러나 종친 공자로서 쌀 걱정, 설 지낼 걱정까지 하지 않을 수가 없으니 이게 어찌 된세상이냐? 태조의 거룩한 피를 물려받은 자기로서, 어디 개뼉다귀인지 알 수도 없는 외척들에게 눌리어서 감히 머리도 들지를 못하니 이것이 무슨 세상이냐?

 

비틀거리던 걸음걸이도 이제는 바르게 되었다. 추위도 막기 겸, 비틀거리는 걸음에 중심도 잡기 겸, 깊이 팔짱을 지르고 머리를 가슴에 묻고 길을 걷던 그는 활개를 펴고 머리까지 높이 들었다.

 

"화무십일홍이요 달도 차면 기우느니...."

 

시조라 할까 노염의 부르짖음이라 할까, 이때 그의 입에서 나온 이 소리는 해석할 자 없었다.

 

명문 민씨의 가문에 태어난 부인은 짜증을 부린다든가 바가지를 긁는 다든가 그런 여도(女道)에 벗어난 일은 하지 않았다. 그러나 설을 지낼 쌀이 떨어진 집안의 주부로서 화평한 얼굴은 할 수가 없었다.

 

술이 취하여 머리를 숙이고 들어오는 흥선을 부인은 미소로 쳐다보았다.

 

"어디서 잘 잡수셨구료?"

 

마음의 모든 불평과 불만을 '여덕(女德)'이라는 커다란 보자기로 싸고 온순과 인종이란 미덕으로써 장식한 귀여운 마음씨였다.

 

여기 대하여 흥선은 부끄러운 듯이 외면을 하여 버렸다. 그 미안을 감추기 위하여,

 

"어, 취하는군!"

 

하면서 추운 듯이 몸을 한번 떨었다.

 

부인이 물었다.

 

"나가셨던 일은 마음대로 되셨습니까?"

 

결기 있는 흥선군이었다. 부인에게 이런 채근을 받을 때에 이전과 같으면,

 

"되고 안되는 것을 여편네가 참견할 것이 아니오."

 

하고 튀겨 버릴 것이었다. 그러나 돌아오기 전부터 벌써 꽤 미안함을 느끼고 있던 흥선은 힐끗 곁눈으로 부인을 한번 본 뒤에,

 

"내일 되겠소. 날도 춥기도 하다."

 

하면서 한번 너털웃음을 웃었다.

 

내일이라 말은 하였다. 그러나 흥선에게는 내일이 아니라 열흘을 연기할지라도 과세 준비를 할 플랜이 서지를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