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로초로 술을 빚어 만년배에 가득 부어......"
"자 대감, 잔을 드세요."
기생이 부르는 권주가를 따라서 병학은 흥선에게 술을 권한다.
흥선은 잔을 들었다. 연거푸 마셨다. 또 먹고 연거푸 먹었으나 취기는 도무지 돌지 않았다.
아니, 취기가 돌지 않았다면 어폐가 있다. 취기는 돌았으나 - 취기가 돌기 때문에 정신은 더욱 똑똑하여 갔다.
공복에 독한 술이 들어갔기 때문에 그의 머리는 여간 어지럽지 않았다. 그 가운데서 세 가지의 생각이 엉키어서 돌아갔다. 팽의 집에서 받은 수모, 그 기억이 더 확대되어 그를 괴롭게 하였다. 잔을 들다가도 그 잔을 도로 놓고 킁킁 코를 울리곤 하였다.
병학의 이 환대가 또한 그의 머리를 어지럽게 하였다. 아무 환대 받을 까닭이 없다. 자기는 아무리 종친이라고 하나 세력 없고 돈 없는 - 시정에 배회하는 한낱 부랑자요, 저편 쪽은 나는 새라도 떨굴 만한 세력가이어늘, 무슨 까닭으로 오늘 이렇듯 자기를 환대하나? 아까도 어떤 그렇지 못할 손님이 온 것도 '일이 있어 못 만나겠다'고 그냥 돌려보내고 자기를 환대 하니 그 까닭을 알 수가 없었다. 이 문제도 그의 머리를 꽤 어지럽게 하였다.
셋째는 자기의 가사 문제였다. 아까는 팽에게 대한 분노 때문에 거기 생각이 미칠 겨를이 없었으나, 술 때문에 머리가 사면으로 활동할 수 있게 된 그에게는, 지금 그 가사 문제가 머리에 걸리어 돌아갔다.
집을 나올 때에 부인은 중문까지 따라 나오면서 그를 바래주었다. 점잖은 집 부인이라, 그 뜻을 입 밖에까지 내지는 않았지만, 오늘은 꼭 좀 마련하여 오라는 당부에 틀림이 없는 것은 흥선도 잘 알았다. 그러나 어디서?
이제는 어디 가서 말해 볼 용기도 없었다. 바로 굶어죽는 한이 있을지라도, 다시는 거기에 대하여 입을 뗄 수 없었다. 그렇게 입을 뗄 수는 없는 일이지만, 또한 어떻게 해서든 마련하지 않으면 또 안 될 일이었다.
병학에게 말하여 볼까, 이렇듯 자기를 환대하는 것을 보면 자기에게 호의를 가지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호의를 가지고 있다 치면 팽과 같이 자기를 망신시키지는 않을 것이다. 술기운도 합하여 좀 용기를 얻은 흥선은, 몇 번을 이렇게 마음먹고 입을 열려 하였는지 알 수 없다. 그러나 급기 입을 열려면 차마 벌어지지를 않곤 하였다.
이러한 여러 가지의 생각 때문에 머리가 어지럽기가 짝이 없는 흥선은, 그 분풀이라는 듯이 연하여 술만 공격하였다. 병학은 끊임없이 권하였지만 병학이 권하기 전에 흥선은 잔을 들고 하였다.
"대감 어떠세요?"
병학이 이렇게 물을 때에 흥선은 방금 받은 잔을 땅 하니 상에 놓으며, 추기를 한꺼번에 토하고 머리를 번쩍 들었다.
"나 늘 먹는 막걸리보다는 맛이 좀 낫소."
하고 무엇을 찾았다.
"대감!"
"네?"
"한참 앉아서 보아야 지금이 대목인데 이 댁에는 빚 받으러 오는 사람이 없으니, 대체 대감은 빚을 안 지셨소? 혹은 지고도 받으려 못 오게 하는 묘책이라도 있소?"
병학은 눈을 크게 하였다. 그 뒤에 눈을 삼박거렸다. 이 질문을 그냥 웃어 버릴지 혹은 변명이나 대답을 해야 할지 모른 것이었다.
뒤따라 흥선의 말이 그냥 계속되었다.
"만약 받으러 못 오게 하는 묘책이라도 있으면 내게 좀 전수를 하시오. 오늘 당장부터라도 써먹어야겠소."
눈만 삼박거리던 영초(穎樵) 김병학은 싱겁게 씩 웃었다. 그리고 기생에게 흥선이 놓은 술잔을 눈짓하였다.
"자, 약주나 드세요."
"아니, 술이 아니라 하 이상해서 그러오. 대목이면 빚쟁이들이 대문이 메어서 들어오는 법인데, 이 댁에는 아무리 보아야 그런 기색도 없으니 말이외다. 보아하니 대감네 가사 비용은 우리 따위보다는 퍽 많이 들 게외다. 술도..."
흥선은 잔을 들었다. 그리고 코로 술의 냄새를 맡아보고 혀끝으로 맛을 보았다.
"우리 먹는 막걸리보다는 훨씬 비쌀 게야. 안주도 - 이건 뭐요? 해파리? 이건 또 비철의 오이? 톡톡히 걸렸을 걸! 이런 건 나 같은, 조상이나 잘 둔 사람을 위해서 따로이 마련한 것은 아니겠지요? 대감 댁에서 보통 쓰시는 것이겠지요? 그 많은 가사 비용을 빚 안 지고야 어떻게 당하겠소? 빚은 나보다 몇천 곱 몇만 곱 되리다. 한데 빚쟁이가 안 오니 웬일이오? 못 오게 하는 묘책이라도 있소?"
주정꾼의 헛소리로 넘기기에는 너무도 쏘는 말이었다. 진정한 질문으로 듣기에는 너무도 기경한 말이었다. 영초는 이 잘못하다가는 재미없는 시비가 일어날 듯한 장면을 뚫고 나아가기 위하여 연하여 미소를 그의 얼굴에 나타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