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명종 때의 일이다.
그때 김효원(金孝元)이라는 사람이 이조 전랑(吏曺銓郞)에 뽑히었다. 이조 전랑이라는 것은 조정의 백관을 전형하여 쓰고 안 쓰는 것을 고선하는 권리를 잡은 지위였다.
그런데 명종비(妃)의 오빠 되는 심의겸(沈義謙)이라는 사람이 거기 대하여 반대를 주장하였다. 그 이유로는 심의겸이, 이전 어떤 날 당시의 재상 윤원형(尹元衡)의 집에 가보니까, 김효원이 그 집 문객으로 있었다. 김효원은 깨끗한 선비의 신분을 지키지 않고, 청년 선비로서 재상가의 문객 노릇을 하는 것은 비루한 일이라, 이런 사람을 전형관을 시키면 벼슬이 공평하게 되지 못하리라는 것을 들어 반대를 한 것이다.
이런 일이 있었기 때문에 김효원은 심의겸을 매우 속으로 밉게 여겼다.
이로부터 얼마 뒤에 심의겸의 아우 심충겸(沈忠謙)이 전랑 벼슬을 하게 되었다. 그러매 이것을 본 효원이 가만히 있을 까닭이 없었다.
충겸은 사림(士林)에 아무 명망도 없는 사람 - 단지 궁중의 척권을 자세삼아 이런 벼슬에 뽑힘은 가당치 않다고 효원이 또한 들고 일어섰다.
이리하여 심씨는 김씨를 가리켜 이전 원한을 이런 곳에 풀려는 소인이라 일컫고 김씨측은 심씨를 가리켜 뒷힘을 입는 비루한 사람이라 하여 서로 시비가 분분하였다.
이 시비가 차차 벌어져서, 단지 심씨 김씨의 싸움이 아니라, 심씨 편을 돕는 패와 김씨 편을 돕는 패가 생겨서 차차 두 패가 서로 맞서서 시비를 하게까지 되었다. 즉 벼슬아치 집안과 사림의 대립이었다.
선조(宣祖) 때에 이르러서 이 시비는 더욱 커졌다. 당시에 이름 있는 사람들이 이 파 저 파로 붙어서 서로 시비하기 시작하였다. 이 발(李潑), 유성룡(柳成龍) 등이 김씨파가 되고, 윤두수(尹斗壽), 박 순(朴淳), 정 철(鄭澈) 등이 심씨의 파가 되었다.
김씨는 동촌(東村)에 살았으므로 김씨파는 동인(東人)이라는 이름을 들었고, 심씨는 서촌(西村)에 살았으므로 심씨파는 서인(西人)이라 불렀다. 이때에 서로 맞서서 군자라 소인이라 하는 시비도 생겨나니 동인과 서인이 차차 벌어지고 또 벌어져서, 조선이라는 나라를 잡아먹은 큰 불집이 되는 당쟁을 낳게 된 것이다.
동인과 서인은 서로 갈라져서 국사에는 생각을 두지 않고, 심지어 사소한 일까지라도 모두 '당파'라 하는 안경으로 내다보면서, 반대파에서 하는 일이라면 좋고 그르고 잘하고 못하고를 막론하고 반대하고, 그 시비를 생각지 않고, 반대파에서 하는 일의 반대되는 일을 자기네의 정책으로 쓰고 하였다.
이렇게 되기 때문에 나라의 정치라 하는 것은 모두 하나도 행하여지는 것이 없고, 오로지 머리를 모으고는 반대파를 거꾸러뜨릴 의논만 거듭하고 하였다.
동인이 세력을 잡을 때는 서인 중에 아무리 인재가 있다 하더라도 녹사 하나를 얻어 하지를 못하였다. 그러다가 우연히 서인의 세상이 되면 어제까지의 재상 명현이던 동인들은 모두 원배를 하거나 혹형을 당하고, 조그만 당하관까지라도 모두 서인의 손으로 넘어가게 되고 하였다.
왕의 전권 시대라 왕의 총애를 사는 파이면 득세하였다. 왕의 총애를 잃은 파이면 실세하였다. 그런지라 그들은 오로지 왕의 총애를 얻으려고 별별 천한 음모까지도 다하였다. 그리고 그래도 왕의 총애를 받기가 어렵게 되면, 그들은 다른 묘책(즉, 그 왕을 폐하고 자기네를 총애하는 새 왕을 만들어 세우려는)을 꾸며내기까지 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당쟁의 폐는 나날이 다달이 더 심하고 심각하여 갔다.
당시의 명유(名儒) 이 이(李珥)가 이 당쟁을 근심하여 어떻게 하여서든 두 파를 조정을 시켜 보려 하였다. 그리고 누누이 상감께 그 일을 계달하였다.
이 이 이의 노력이 성공을 하여, 나라에서는 두 파의 사람을 조정시키기 위하여 두 파의 근원인 심의겸과 김효원을, 심은 개성 유수(開城留守)로, 김은 경흥 부사(慶興府使)로 보내기로 하였다. 그러나 이 조정책이 오히려 두 파의 대립을 더욱 크게 한 것이다.
개성은 이 나라의 중요한 고장이요, 경흥은 함경도 한편 구석에 달린 외딴 색북이라, 그러니 개성 유수라는 것은 영직이려니와, 경흥 부사라는 것은 개성 유수에 비기건대 창피한 벼슬이다. 이 조처는 두 파를 조정시키는 것이 아니라, 서인을 높여 주고 동인을 낮추어 주는 것이라 동인측에서 이러한 반대성이 일어났다. 그리고 이 조처의 장본이 되는 이 이를 공격하였다.
이 공격이 너무 심하였으므로 조정에서는 동인측의 송응개(宋應漑), 박근원(朴謹元), 허 봉(許 )의 세 사람을 정배를 보냈다. 이것이 조위 계미 삼찬(癸未三竄) 사건이다. 그리고 이 일 때문에 이 이는 어느덧 중립자의 지위에서 서인의 거두로 돌아서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