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시 그 자리에 서 있다가 흥선은 갓과 웃옷을 벗어 걸고 안방으로 들어가 보기로 하였다. 모든 자기의 자존심을, 벗어버리고, 부인에게 미안하노라는 말 한 마디를 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겸하여 김병학의 호의를 말하고 팽 경장의 횡포를 말하여, 같이 분해하고 같이 감사하기 위해서였다.
안뜰에 들어서 보니 앙침까지도 쓸쓸하기 짝이 없던 안뜰도 활기를 띠었다. 부엌이며 뜰이며 쪽마루며 할 것 없이, 하인들은 과세의 음식을 차리느라고 욱쩍하고 있었다. 세찬 한 군데 들어올 곳이 없는 이 가난한 공자의 집에도 하인들이 뜰에 우글거리고 다니니, 겨우 대목 같기도 하였고 사람 사는 집 같기도 하였다.
이 가운데서 흥선은 자기의 몸에 감긴 비단옷을 서투른 듯이 굽어보며 댓돌 위에 올라섰다.
"백구야 훨훨 날지를 마라."
이런 싱거운 때의 기분을 감추기 위하여 노래를 코로 부르면서 안방으로 들어오는 흥선을 부인은 일어서면서 맞았다. 이 부인을 따라서 일어서서 아버지의 귀택을 맞는 소년 - 애명을 개똥이라 하는 이재황(李載晃)이었다.
"사동 김 판서가 세찬을 보내 주셔서..."
부인이 흥선에게 이 말을 할 때는 부인의 눈에는 눈물까지 있었다.
모든 것이 영초의 보낸 물건이었다. 명색은 세찬이라 하되, 그것은 세찬이 아니요 당분간의 흥선 댁의 생활비와 생활 필요품 전부였다. 금전, 미곡, 그밖에 생활품이 몇 짐, 영초에게서 세찬이란 명목으로 흥선에게 온 것이었다.
흥선은 눈을 감고 생각하였다. 아까 팽 경장에게 욕을 보고 추운 겨울의 거리를 지향없이 돌아다닐 때에, 길에서 영초의 행차를 만나서 억지로 자기의 집으로 데리고 가던 영초 - 그 뒤 정성을 다하여 자기를 환대하던 영초 - 자기가 돌아올 때에 격식에 벗어나서 중문까지 자기를 보내 주던 영초 - 세력 없고 돈 없는 자기인지라, 거리의 마바리꾼 하나도 자기에게 호의를 보여 주는 사람이 없는 이 기박한 세상에서, 당대의 권문인 영초 김병학이 이렇듯 호의를 보여 준 것에 대하여 흥선은 감사하기가 짝이 없었다.
돌아보건대 현 상감의 직접 인척 되는 김씨의 일족은 물론이요, 심 모, 남 모, 이 모, 홍 모를 막론하고 동석하기조차 창피하다고 피하는 자기에게, 영초는 무슨 호의로 이런 것을 보내었는가? 받을 가망이 없는 빚은 절대로 주지 않는 이 기박한 세상에서, 영초는 무슨 까닭으로 자기에게 이렇듯 호의를 쓰나?
한참 눈을 감고 있다가 그 눈을 뜨면서 흥선은 이렇게 말하였다.
"응, 영초를 정승을 시켜 주지."
부인이 미소하면서 흥선을 쳐다보았다.
"정승은커녕 대감께 녹사(錄事) 하나를 시킬 권한이 있습니까?"
"시켜 주지, 시켜 주어, 하다 못해 꿈에라도 시켜 주지."
"그렇지요. 꿈에나 시키지 생시에야 어떻게 시키겠습니까?"
흥선은 잠시 떴던 눈을 다시 감았다. 때때로 생각하는 망상이 또 다시 그를 엄습하였다. 그 망상 가운데 나타나는 자기는 오늘과 같은 폐의파립의 가련한 공자가 아니요, 이 삼백여 주의 큰 나라를 호령할 대원군인 자기였다. 지금 영초가 보내 준 새 옷을 갈아입고 아랫목에 기쁜 듯이 앉아 있는 재황은, 그때는 아들이라는 명칭으로는 부르지도 못할 이 나라의 지존이었다. 그때는, 그때야말로 -
"부인!"
흥선은 눈을 감은 채로 부인을 찾았다.
"대왕대비마마(먼젓번 임금 헌종의 어머님) 조씨(趙氏)께 진상할 무슨 세찬이라도..."
"아, 참 깜빡 잊었습니다. 무슨 - 어떤 것을 하리까?"
"무엇이고 대비마마께서도 우리가 곤핍한 줄은 다 잘 아시니까 XX을 팔아서라도 대비께 세찬만은 잊어서는 안됩니다."
대왕대비 - (이 종실의 가장 웃어른) 비록 지금 낙척하여 조석의 끼니까지 부자유를 느끼는 형편이지만, 종실의 한사람이요 영특한 아들을 가지고 있는 흥선은, 거기 대하여 어떤 야망을 품지 않을 수가 없었다. 후사가 없으시고 몸이 약하신 현 상감 - 상감 불행히 승하하신 뒤에는 신왕을 지정할 권리는 종실의 어른 되는 대왕대비가 가지게 될 것이다.
야심과 패기를 마음속에 가득히 가지고 있는 흥선은, 아무 보잘 것이 없는 지금의 지위에 있으면서도 그것을 뚫고 나갈 계획만은 끊임없이 하고 있었다. 그런 필요상 대왕대비께만은 자기의 가난한 주머니를 털어서 늘 환심을 사 두기를 게을리 하지 않는 것이었다.
한참 눈을 감고 있다가 흥선은 고요히 눈을 다시 떴다.
"영초는 영의정의 재목은 못 돼. 우의정이나 주지."
그리고 이 말에 미소로써 자기를 바라보는 부인을 흥선도 또한 미소로써 마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