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회를 타서 이 궁중의 애욕 문제를 당쟁에 쓰려고 일어선 것이 남인 이현기(李玄紀), 남치훈(南致薰) 등이었다. 그들은 왕께 품하여 자기네들의 정적(政敵)인 서인들을 모두 극형에 처하고 혹은 정배 보내게 하였다. 그리고 왕비 민씨는 떨구어서 서인(庶人)으로 하게 하여 안국동 자기의 집으로 내어쫓았다.
후궁이던 장씨는 여기서 당당한 왕비로 승격을 하였다. 동시에 그 세력이 커짐과 함께 남인들의 세력도 커져서 세상은 남인의 세상으로 변하였다.
정부의 중요한 자리, 각 곳 수령 방백은 모두 남인 혹은 남인의 집안 사람이 점령하였다. 한때 찬란한 남인 전성 시대를 이루었다.
그러나 본래 어둡지 않은 숙종은 오래 혼미한 꿈에만 잠겨 있지 않았다. 장씨의 허물을 겨우 알았다. 동평군과의 사이도 또한 눈치채었다. 그러는 동안에 세력 잃은 서인들의 책동도 여기 가하게 되어, 어젯날의 재상이요 권력가들은 오늘 다시 야에 내려가게 되고, 다시금 서인의 천지를 이루게 되었다.
이리하여 여기서 당쟁은 고조에 달해서, 이때에 맺힌 원한은 서로 풀 길이 없게 되었다.
이 숙종 때에 서인은 또한 노론과 소론으로 갈리게 되었다. 변변찮은 문제로써 또한 서인도 두 파로 나뉘어 버린 것이었다.
이리하여 여기 네 가지의 당파가 생겼다. 본시 서인으로서 지금은 두 파가 된 노론 소론과, 본시 동인으로서 지금은 두 파가 된 남인 북인(북인은 또 여러 파로 갈렸지만) - 이것이 소위 사색(四色)으로서, 조선 정권의 쟁탈전은 이 뒤부터 늘 이 네 파에서 하게 되었다.
내려와서 영조 때에는 노론과 소론의 다툼이 격렬하게 되매, 영조는 현철한 군주라 탕평 정책으로 두 파를 융화시키려 했지만 잘 가리지를 못하였고, 오늘은 노론, 내일은 소론, 이렇게 정권이 이리저리 돌아다니다가 드디어 한때는 노론들 때문에 소론은 씨도 없이 전멸될 뻔까지 하였다.
그때에 당쟁열이 얼마나 심하였는지는 아래의 한 예를 보아도 알 것이다.
이인좌(李麟佐)가 청주 땅에서 반역의 기를 들고 일어났을 때, 조정에서는 이인좌가 소론의 한 사람이라는 불미로,
"소론의 난리는 소론이 진정시켜라."
고 대장, 중군에서 영장에 이르기까지 모두 소론 가운데서 내보냈다.
이리하여 그때는 노론 혹은 소론 가운데 한 사람의 개인적 행동까지라도 모두 당쟁에 이용하고 세력 다툼에 이용하였다. 사도세자(思悼世子)의 비참한 최후도 노론 소론의 당쟁에서 생겨난 것이다.
영조는 정궁께 아드님을 못 보고 후궁 이씨에게서 경의군(敬義君)이 탄생하였는데, 영특하고 총명하므로 왕은 이를 세자로 봉하였다.
그러나 세자는 불행히 열 살에 하세하였다.
여기서 노론들은 종친 가운데서 동궁을 한 분 간택합시사는 의견을 내었다. 거기 반하여 소론측에서는 상감이 아직 춘추가 많지 않으시니 기다려 보는 것이 옳은 일이라 반대하였다.
왕은 소론의 말을 옳게 여기고 기다리는 동안, 영빈 이씨(暎嬪李氏)의 몸에서 왕자가 탄생하였다.
이이가 즉 사도세자(思悼世子)이다. 이이를 사이에 두고 맹렬한 당쟁과 음모 등이 계속되어, 마지막에는 세자가 부왕의 오해를 사서 뒤주 속에서 굶어서 하세하게 된 비참한 사실까지 생겨난 것이다.
사도세자의 아드님이요 영조의 손주 되는 정조(正祖)는 현철하고 명석한 군주였다.
정조는 이 당쟁의 폐를 알아보았다. 그리고 이것을 없이하여 버리기는 매우 힘든 것을 알았다. 그래서 이 사색 당인들로 하여금 당쟁에 마음을 둘 겨를이 없게 하려고, 그 수단으로서 여러 가지 사업을 일으켰다.
편찬, 효자 열녀의 표창, 과거, 치수치산, 온갖 일을 안출하여 내어서 당쟁에 마음을 둘 틈이 없게 하였다. 이리하여 이씨조의 중흥 사업은 성취될 듯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