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족 끼리끼리의 교제도 없었다. 만약 섣불리 교제를 하다가는 어떤 죄명 아래 어떤 형벌이 자기네의 위에 가해질지 알 수 없는 것이었다.

 

궁을 떠난 종친이야말로 고래 싸움에 치인 새우의 격으로서, 당쟁에 희생되어 몸은 당당한 종실 공자면서도 굶주림에 헤매는 가련한 사람들이었다.


흥선군 이하응(李昰應)은 이씨조 21대 영조의 현손(玄孫)이요, 사도세자의 증손이었다.

 

영조의 세손이요 사도세자의 아드님인 정조가 등극을 하고, 그 뒤 순조를 지나서 순조의 세손 헌종이 등극할 동안 - 흥선군의 집안으로 보자면 흥선의 할아버지 은신군 충헌공(恩信君忠獻公)의 대에는 지존과는 동기이던 것이, 흥선의 아버지 남연군 충정공(南延君忠正公)으로부터 흥선에게 이를 동안 - 궁중에서는 사도세자로부터 사 대째 내려오고 흥선가에서는 사도세자로부터 삼 대째 내려올 동안 - 동기가 삼촌이 되고 삼촌이 사촌 오촌으로 벌어져서 헌종과 흥선군과는 칠촌숙질로 벌어질 동안 - 궁을 떠난 이 집은 영락되고 또 영락되었다.

 

순조의 뒤를 이어서 여덟 살에 등극하였던 세손 헌종이 기유(己酉) 유월 초엿샛날 보수 스물 셋으로 후사가 없이 승하하였다. 아직 청년이기 때문에 따로이 세자도 책립치 않고, 헌종의 아버님인 익종도 소년 하세하기 때문에 세제(世弟)도 없었으므로, 종친 가운데서 지존을 모셔오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만약 흥선으로서 나이가 좀더 어려서 그때의 척신인 김씨들에게 좌우될 만하든가, 그렇지 않으면 몸가짐이라도 좀 단정하였더면 헌종의 뒤를 이어서 제 이십 오 대의 보위에 올라갈 자격이 넉넉하였던 것이었다.

 

그러나 운명의 신은 이 영락된 공자를 돌보지 아니하였다.

 

헌종이 창덕궁 중희당(重熙堂)에서 갑자기 승하하고, 그 세자며 세제도 없었기 때문에 종친회의가 열리고, 이 사직의 승계자를 지정할 권리를 홀로 잡은 대황대비(순조비 김씨)께 중신들이 후사 지정을 간원할 적에, 대황대비는 가까이 이 서울에 있는 흥선군을 지적하지 않고, 강화(江華)에 내려가서 농사에 종사하고 있는 철종을 지적한 것이었다. 같은 사도세자를 증조부로 하고 삼 대째 내려온 흥선의 육촌동생이었다.

 

"영묘(英廟)의 혈맥은 승하하신 금상과 강화의 원범(元範)뿐 - 그를 모셔다가 이 사직을 잇게 하오."

 

이것이 대왕대비의 하교였다.

 

이리하여 행운의 신은 슬쩍 흥선의 집안을 그저 넘어가 버렸다.

 

궁중 부중은 그때 김씨의 천지였다.

 

순조 왕비도 김씨였다. 순조의 아드님으로, 보위에 오르기 전에 하세한 익종의 비는 조씨(趙氏)이나, 익종의 아드님인 헌종의 비도 처음은 승지 김조은(金祖垠)의 따님이었다. 강화도에서 모셔온 철종도 김문근(金汶根)의 따님을 비로 삼았다.

 

이리하여 삼 대째 내려온 김씨의 세력은, 궁중 부중을 무론하고 하늘을 찌를 듯하였다. 이런지라, 벌써 성년자요 대처자(帶妻者)인 흥선은 절대로 보위 후계자의 가운데 손꼽힐 자격조차 없는 사람이었다.

 

전 상감은 자기의 칠촌 조카이며, 현 상감은 자기의 육촌동생이로되, 이 영락된 공자 흥선은 척신 김씨의 세력에 압도되어, 마치 상갓집 개와 같이 주린 배를 움켜쥐고 투전판이며 술집을 찾아서, 시정의 무뢰한들과 어깨를 겨루고 배회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때때로 술값이라도 정 몰리면 붓을 잡아 난초를 그려서, 그것을 팔아 달라고 각 대관의 집을 지근지근 찾아다니는 것이었다. 마음이 끝없이 교만한 대관 댁 청지기며 하인들에게 갖은 비웃음을 다 받지만, 이 공자는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여전히 폐의파립으로 그들의 집을 찾아다니며 귀찮게 구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