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은 무슨 필요로 자기가 이런 학문을 배워야 하는지 이해하지 못하였다. 하기야 집안이 왕실의 친척인지라, 종친 된 자는 반드시 배워 두어야만 하는 것이거니 이만큼 알아두었다.

 

만약 이런 장면을 당시의 권문 척신들이 보았으면 그들은 간담이 서늘해질 것이었다. 단지 한 투전꾼이요 주정꾼이요 주책없는 인물로 알아오던 흥선이, 자기의 집에서는 자기의 둘째아들을 옆에 놓고 왕자의 덕이라는 것을 강술하는 줄을 알면, 흥선은 목이 열 개라도 당하지를 못할 것이었다.

 

표면 세상이 침을 뱉는 창피한 짓을 예사로이 하며 권문집 생일날이며 제삿날은 반드시 잊지 않고 기신기신 찾아다니는 흥선은, 집안에 있어서는 남이 예측하지 못할 규칙 바른 가장이며 자애와 엄격을 가진 지배자였다.

 

무식한 아버지 아래에서 아무 배움이 없이 길러난 줄로 세상에 알려져 있는 고종이, 후일 무서운 패력으로써 이 삼천리를 지배하고 지도한 것은,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의 끊임없는 지도와 교육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벌써 야인으로 길러난 맏아들은 할 수 없이 내버려두고, 흥선은 이 둘째 아들의 훈도에 전력을 다하였다. 남이 모르는 애, 남이 알았다는 큰일이 날 애를 쓰고 또 썼다.

 

가묘(家廟)의 다례(茶禮)가 끝난 뒤에 소년은 뜰로 나왔다. 꽤 추운 겨울날이로되 바깥에 단련된 소년에게는 그다지 영향 되지 않았다. 장난꾸러기의 소년 - 소년은 앞으로 돌아와서 새벽부터 벼르고 벼르던 연을 날렸다.

 

알맞추 부는 바람에 연은 소년의 손을 떠나서 둥실둥실 하늘로 올라갔다.

 

그 연이 꽤 높이 올라서 얼른 보면 알아보지 못하리만치 되었을 적에야 흥선은 사당에서 나왔다.

 

어두운 사당에서 나온 흥선은, 눈이 부신 듯이 얼굴을 찌푸리고 앞으로 돌아왔다. 거기서 연을 올리는 아들을 본 흥선은, 소년의 손에서 연 달린 줄을 따라서 하늘 높이 너울거리는 연을 잠시 보고 있다가 사랑으로 들어갔다.

 

막 정침으로 들어가려다가 흥선은 청지기의 방 앞에서 발을 멈추었다. 그리고 두어 번 발로 마루를 쿵쿵 울렸다. 그 소리에 응하여 청지기가 나왔다.

 

흥선은, 뒷짐을 지고 머리를 수그린 채 대령한 청지기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없이 잠시 서 있다가 그냥 휙 발을 도로 떼었다. 그러나 한 발짝 떼고 두 발짝 떼고 세 발짝 째 떼려다가, 그는 다시 고즈너기 돌아섰다. 그리고 청지기에게 향하여,

 

"좀 있다가 이 주부(李主簿)가 오시거든 내 침방으로 모셔라. 그밖에는 아무 놈…"

 

흥선은 허투루 나오려던 말을 얼른 도로 삼켰다.

 

"누가 오시든 간에 대감은 문안 가시고 안 계시다고 돌려보내라."

 

하였다. 그 '누구든'이란 말의 한계를 똑똑히 몰라서 청지기가 어릿거릴 때에 흥선은 거기 대하여,

 

"상감이 거둥하셨더라도 없다고 그러란 말이다."

 

하고는 휙 정침으로 향하여 사라져 버렸다.

 

이 주부라는 것은 이호준(李鎬俊)을 가리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