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러한 가운데서 흥선은 호준에게 부탁하였던 일이 혹은 틀려 나가지 않았나 의심하여 보았다. 만약 마음대로 되었을 것 같으면 이렇듯 호준이 그 말머리를 유유히 꺼낼 까닭이 없기 때문이었다.

 

호준은 흥선을 따라서 몸을 좌우로 건들건들 흔들었다. 다시 말이 끊어졌다.

 

흥선이 호준에게 부탁하였던 것은 다른 일이 아니었다. 새해의 문안을 핑계삼아서 조대비께 가서 뵙기를 호준에게 그 알선을 당부한 것이었다.

 

흥선은 비록 종친이라 하나, 세력 없고 돈 없는 종친으로서, 궁중에서는 벌써 잊어버린 존재였다. 설혹 잊어버리지는 않았다 할지라도, 한 부랑자로밖에는 알려져 있지 않은 흥선은, 남의 알선이 없이는 대비께 가서 뵐 자격이 없는 인물이었다.

 

궁실의 어른이요 종실의 가장 되는 조대비는 오십을 눈앞에 바라보는 초로(初老)였다.

 

경인년(庚寅年) 오월 초엿샛날 그의 사랑하는 지아버님되는 익종(翼宗=당시 세자)을 잃은 때는, 그는 인생의 꽃동산을 겨우 내다본 스물 세 살 되는 해였다.

 

그로부터 반 오십 년간, 위로는 시어머님 되는 순조비(純祖妃)를 모시고, 아래로는 아드님 되는 헌종을 거느리고 외로운 공규를 지켜 내려온 것이었다.

 

기유년(己酉年) 유월 초엿샛날, 그의 가장 사랑하는 외아드님인 헌종이 승하를 한 뒤에도, 위로 시어머님을 모신 그는 신왕 영립에 대하여 한 마디도 말할 권리도 없이 뜻에 안 맞는 신왕을 묵묵히 맞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정사년(丁巳年) 팔월, 그의 시어머님 되는 순조비 김씨조차 하세하자 조대비는 이 궁실의 어른이 되었다.

 

상감 철종 한 분밖에는 남인(男人)이 없는 궁실이었다. 역대의 군주가 모두 일찍이 승하를 하였기 때문에, 홀로 남은 대비·왕비·귀비·상궁·나인 등 여인만 가득히 차 있고, 남인이라고는 상감 한 분뿐이었다. 이러한 궁실에 조대비는 그 어른이었다.

 

위로는 거리끼는 아무 권력도 없고 아래로는 상감 및 많은 여인을 거느린 대비는, 현 궁실의 가장이었다. 궁실의 동태를 종묘에 고할 권리를 가진 유일한 어른이었다. 비록 정치에는 간섭할 권리가 없으나, 종실의 움직임에 관해서는 절대의 권리자이며, 다른 사람의 용훼를 허락하지 않는 최고 권위자였다.

 

인생의 꽃동산을 겨우 들여다본 때부터 반 오십 년간을 시어머님 순조비를 모시고 인종(忍從)이라 하는 덕을 두터이 쓰고 지나온 그인지라, 그의 마음속에 어떤 배포가 있는지는 뉘라서 알 사람이 없었다.

 

흥선이 이호준을 통하여 조대비께 가까이하고자 함은, 궁실의 어른 되는 조대비의 환심을 사서, 장래 입신상 무슨 도움이라도 얻고자 함이었다.

 

이호준은 특별히 조대비께 가까운 처지는 아니었다. 그러나 호준에게는 사위 되는 조성하(趙成夏)가 있었고, 조성하는 조대비의 친조카가 되는 사람이요, 또한 조대비의 총애를 매우 받고 있는 사람이었다.

 

이렇게 결련결련하여 흥선은 호준을 통하여 조성하를 사이에 두고 조대비께 가까이하여 보고자 한 것이었다. 오늘 새해의 문안으로 당연히 조대비께 가서 뵈일 조성하를 통하여, 그 기회에 흥선이 조대비께 뵈일 기회를 알선하고자 함이었다.

 

결과가 어떻게 될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어렸을 때부터 시정에 드나들어서 귀인이 경험하지 못할 별별 경험을 다 겪은 흥선은, 깊은 궁중에서 쓸쓸한 반 오십 년간을 보낸 조대비를 충분히 기껍게 하고, 따라서 그의 총애를 얻을 만한 자신은 있다. 그래서 더욱 호준의 회보를 초조히 기다린 것이었다.

 

잠시 좌우로 허리만 건들거리던 호준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오늘 기다리실 줄은 알았지만 성하가 저녁때가 돼서야 겨우 나왔습니다."

 

"오늘 들어갔더랍디까?"

 

"네."

 

"그래-?"

 

 호준은 눈을 굴렸다. 그 눈으로 흥선을 바로 보았다. 호준의 눈자위에는 미소가 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