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지기는 그러겠노라는 뜻으로 허리를 한번 굽히고 도로 나갔다.
그러나 나간 청지기가 명령대로 호준에게 전하려 할 때에, 흥선은 다시 큰소리로 청지기를 불렀다.
"일껏 왔는데 잠깐만 만나 볼 테니 이리로 모셔라."
아까의 명령은 급히 취소하여 버린 것이었다.
청지기의 인도로 호준은 흥선의 침방으로 들어왔다. 그리고서 새해의 문안으로 먼저 절을 하였다.
호준이가 문으로 들어올 동안, 그리고 또한 문안을 하는 동안 흥선은 몸을 일으키고 눈을 들어서 먼저 호준의 얼굴 표정을 바라보았다. 당부하였던 긴한 일에 대하여 호준은 어떠한 표정을 가지고 돌아왔나 - 말로써 대답을 듣기 전에 먼저 얼굴에 나타난 표정으로써 그 대답을 얻으려 하였다.
그러나 호준의 얼굴에는 별다른 아무 표정도 나타나 있지 않았다.
"저녁이 되면서 날이 몹시 차집니다."
추운 듯이 손을 비비며 호준은 먼저 이런 말을 하였다.
불혹(不惑)을 넘은 흥선이었다. 온갖 마음과 몸의 고생을 다 겪은 흥선이었다. 그러나 흥선의 마음은 이 유유히 날씨의 인사부터 하자는 호준의 태도 때문에 초조하였다.
그가 호준에게 부탁한 일이 심상하지 않은 일 - 그 대답의 좌우를 보아서는 혹은 운명에 중대한 변화가 생길지도 알 수 없는 일이어늘, 그런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호준의 태도는 너무나 유유하였다.
한가로이 날씨의 인사를 하는 호준의 낯을 흥선은 마땅치 못한 듯이 바라보았다. 그리고 화로라도 쬐라는 뜻으로 화로를 가리켰다.
"아마 무척 기다리셨습지요?"
호준의 두 번째 말이었다.
"아니, 나도 어디 나갔다가 이제야 막 돌아온걸."
무슨 필요로 이런 거짓말을 하였는지 스스로도 알 수 없지만, 흥선은 이렇게 말하고 천천히 좌우로 건들건들 흔들기 시작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