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그 뒤를 이은 순조(純祖)의 대부터 다시금 당쟁은 시작되었다.

 

순조의 재위 삼십 사 년간, 또한 그 뒤를 이은 헌종(憲宗) 재위 십 오 년간, 한 대 더 내려와서 철종(哲宗)의 대에 이르기까지 순조의 등극한 것이 열 한 살 되던 해요, 헌종은 홑 여덟 살 되던 해며, 철종은 강화도의 한 초동(樵童)으로서 열 아홉 살에 등극을 하여서 그때부터야 비로소 글을 배웠으니, 이 삼 대의 임금의 군권이 펼 까닭이 없었다.

 

이 삼 대의 임금의 뒤에서 수렴청정(垂簾廳政)한 이가 대대의 대비였다. 이리하여 당쟁은 통어할 이가 없어 그 극도에 달하고, 정사는 극도로 어지럽게만 된 것이다. 오늘의 공신이 내일은 역신으로 몰리고, 어제의 역신이 오늘의 공신으로 되고 - 이렇듯 그 변천이 짝이 없었다. 그리고 또 변천이 무쌍한지라 안정되는 일이 도무지 없었다.


이런 당쟁의 틈에 끼여서 간련한 생활을 계속한 사람은 왕족들이었다. 왕자(王子), 왕형제(王兄弟), 왕손(王孫), 왕숙질(王淑侄)은 무론하고, 왕실의 피를 받은 사람들은 모두 참혹한 생활을 계속하는 것이었다.

 

당쟁에 있어서 자기네의 세력을 펴기에 제일 간단하고 경편한 수단은, 자기네들 가운데서 딸이나 누이를 궁중에 들여보내서 후궁이나 혹은 왕비를 삼는 것이었다. 척신이 되어 가지고야 그들은 마음대로 세력을 펼 수가 있었고 마음대로 자세를 할 수가 있었다. 그들은 세력 잡는 제일의 수단으로서 누이나 딸을 궁중으로 들여보냈다.

 

그런지라, 당파의 세력의 증장(增長)을 따라서 비(妃)가 빈(嬪)이나 서인(庶人)으로 떨어지고, 빈이나 서인이 일약 비로 승격을 하고 하는 일이 무상하였다. 거기 따라서는 또한 어젯날의 세자이던 분이 오늘은 역모로 몰려서 극형을 당하고, 어제의 무명한 종친이 동궁으로 책립이 되고 하는 일이 무상하였다.

 

조금만 왕과 촌수가 벌어지는 종친은 누구든 경이원지(敬而遠之)하였다. 왕족의 생명이 위태롭기 짝이 없는 시대에 있어서 왕족과 친히 하다가는, 만약 어떤 정책상 그 왕족이 역모로 몰리는 날에는, 자기도 애매한 죽음을 하기가 쉬워서 왕족과의 교제는 서로 꺼렸다.

 

이씨 조선의 역사를 뒤져보자면, 명료하지 못한 죄명으로 혹은 유배, 혹은 극형을 당한 왕족이 수가 없다. 현왕의 총신으로서 후대 왕께까지 총애를 받으려면 반드시 자기네와 마음이 맞는 이를 세자로 정하도록 책동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그러자면 자기네와 마음이 맞지 않는 종친은 이 세상에서 존재를 없이하여 버려야 할 것이다. 그런 필요상 가장 손쉽고 중한 벌을 가할 죄명은 역모라 하는 것이다.

 

이리하여 역모라는 죄명에 몰려서 비명에 타계(他界)한 왕족의 수효는 이루 다 헤일 수가 없다.

 

노론이 세력을 잡은 때는 소론측에서 추대하려던 세자는 반드시 해를 보았다. 소론측에서 세력을 잡은 때는 남인을 왼편으로 한 왕자는 반드시 해를 보았다.

 

이리하여 노론·소론, 남인·북인이 바꾸어 가면서 정권을 잡는 동안 종친은 무수히 해를 보았다.

 

이 때문에 좀 슬기로운 종친들은 할 수 있는 대로 왕실을 벗어났다. 정계(政界)를 멀리하였다. 그리고 삼촌이 사촌이 되고 사촌이 오촌 육촌으로, 왕실과 사이가 벌어져 가는 동안 이 가련한 종친들은 밥을 위하여 혹은 낙향을 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영락의 지위에서 어떻게 어떻게 능지기라는 소역(小役)이나 얻어서 겨우 그들의 굶주린 입을 쳐나가는 것이었다.

 

왕족이 벼슬을 하는 것은 금하는 바였다. 그 금령 때문에 벼슬도 할 수 없고, 그렇다고 왕족으로서 상인(商人)이나 공인(工人)이 될 수도 없는 영락된 공자들은, 자기네의 사촌 혹은 오촌 육촌이 팔도 삼백 주를 호령하는 지존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상갓집 개 모양으로 굶주린 배를 움켜쥐고 헤헤 하며 장안 대도를 헤매는 것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낙향을 하여 몸소 낫을 잡아 새를 베며 보섭을 끌어 밭을 가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