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는 동안에 동인 가운데서도 또한 그 안에서 파가 갈리어서 남인과 북인의 구별이 생겼으니, 그것은 이렇게 생긴 것이다. 즉, 이 이의 조정으로 말미암아 정부에는 동인과 서인이 아울러 서게 되었는데, 동인 가운데서 정여립(鄭汝立)이라는 사람을 쓰는 데 대하여, 동인 가운데 이 발과 우성전(禹成傳)의 의견이 일치하지 못하였다. 그래서 이씨의 당인 정인홍(鄭仁弘)이 상감께 우성전을 공격하는 상소를 하였다.

 

이 때문에 우씨를 옹호하는 유성룡(柳成龍), 이덕형(李德馨) 등과 이씨를 옹호하는 파와의 사이가 또한 벌어졌다. 우씨는 남산동에 살았으므로 우씨의 파는 남인이라는 지명을 받았고, 이씨는 북촌에 거하였으므로 이씨 파는 북인이라는 지명을 받았다.

 

이리하여 동인은 남인과 북인으로 갈라졌지만, 본시는 같은 당이므로 서로 모함하고 죽이고 하는 일은 없이 그렁저렁 지냈다.

 

유명한 기축 옥사(己丑獄事)도 동인 서인의 당쟁이었다. 서인 정 철(鄭澈)이 동인 정여립의 대역죄를 다스렸는데, 그때 동인으로 지목받는 명사들로 죄없이 벌받은 사람이 수백 명이나 되었다. 그리고 이 일 때문에 동서의 당쟁은 이 뒤에는 도저히 조정할 수가 없도록 서로 원한은 크게 되었다.

 

그 뒤 광해군(光海君)의 조에 이르러서 광해군을 가운데 두고 북인 가운데 대북(大北) 소북(小北)이 갈리고, 대북에는 또한 골북(骨北) 육북(肉北)의 파가 생겨서, 대북 전성 시대를 이루었다가 인조의 반정(仁祖反正)으로 대북파는 역모로 몰려서 전멸하여 버리고, 소북만 겨우 그 명맥을 유지하였다. 그러나 원체 소북은 그 사람 수효도 적고 세력도 없었으므로, 정권 쟁탈의 제일선에는 나서 보지를 못하였다.

 

동인의 한 갈래인 남인과 서인과의 정쟁만 계속되었다.

 

인조 등극 후에 정권을 잡은 것은 서인이었다. 그러나 남인 가운데도 이원익(李元翼) 같은 명사를 기용하여 한때 남인과 서인의 다툼이 주춤하게 되었다.

 

정치의 실권은 서인이 잡았다. 남인들은 자연히 명목만 있고 실권은 없는 벼슬로 몰리게 되었다.

 

이리하여 표면적이나마 서인과 남인 사이의 정권 쟁탈전은 한때 식어진 듯이 보였다.

 

효종(孝宗)이 등극하였다.

 

효종은 세자 시절에 심양(瀋陽 = 奉天)에 잡혀가서 욕을 본 일이 있는지라, 그 철천지한을 잊을 수가 없어서, 나라를 독려하여 예의로 국력 배양에 힘썼다. 그 위에 당시의 명신이요 유명한 학자인 우암 송시열(尤庵宋時烈)은 서인의 거두라, 서인과 남인의 싸움은 일어날 겨를도 없었고 감히 일으키지도 못하였다.

 

청국을 정벌한다는 커다란 희망을 품은 채 실행하지 못하고 효종이 승하하고 현종(顯宗)이 등극하였다.

 

그때에 효종의 모후(母后)의 복제 문제로 남인 허 목(許穆), 윤 선도(尹善道) 등과 서인 송 시열 사이에 의견 충돌이 생겼다. 여기서 한때 죽었던 남인 서인의 다툼이 다시 일어나게 되었다. 이것이 소위 기해예송(己亥禮訟)으로서, 효종이라 하는 튼튼한 돌쩌귀가 없어지기 때문에 다시금 싸움은 시작된 것이다.

 

다음 숙종 때에는 유명한 '폐비 사건'이 생겼다.

 

숙종에게는 장씨라 하는 아리따운 후궁이 있었다. 숙종은 그 후궁에 혹하여서 왕비 민씨를 돌보지 않았다.

 

그런데 장씨라 하는 후궁은 본시 음탕하고 간교한 여인으로서, 왕의 총애뿐은 부족히 생각하여 종친 동평군(東平君)과 가까이하였다. 그리고 왕의 총애를 자세삼아 방자한 행동이 많았다.

 

숙종, 왕비 민씨, 후궁 장씨 - 이 델리케이트한 관계를 두고 또 여기서 맹렬한 당쟁이 일어났다.

 

송시열, 김수항(金수恒) 등 당시의 재상들은 모두 서인이었다. 이 재상들은 모두 민왕비의 두호자로서, 사리를 들고 의를 들고 예를 들어서 왕께 후궁 장씨를 멀리하기를 간하였다. 그러나 장씨에게 깊이 마음을 잡힌 왕은 이 재상들의 간을 즐겁게 여길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