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때에 임하여 이 온갖 고난과 수모를 다 겪고 또 겪은 흥선의 머리에 떠오르는 생각은 이런 것이었다.
상감께는 가까운 혈기가 안 계시다. 상감 승하하신 뒤에는 이 팔도 삼백 주의 어른이 될 분은 당연히 종친 중에서 골라내지 않을 수가 없을 것이다.
아아, 장래에 만약 그런 날이 생긴다면 - 자기에게는 아들이 있다. 종친 중의 한사람인 자기에게는 장래 이 나라의 통치자로서 아무 부끄러움이 없을 훌륭한 아들이 있다. 그때 만약, 만약...
팽? 김? 민? 이? 이 세상에 두려울 자가 누구랴. 지금 자기들이 이렇듯 수모한 팽도 그날에는 땅에 코를 끌면서 자기에게 절하리라.
추위도 감각하지 못하였다. 자기가 걷는 곳이 어디인지도 알지 못하였다. 분노와 망상 때문에 흥선은 머리를 가슴에 푹 묻고 땅만 내려다보며 연하여 퉤 퉤 침을 뱉으며 걸었다.
이 망상에 빠져서 제 정신을 못 차리는 흥선의 귀에 그의 분노를 더욱 돋우려는 듯이 저편 길 모퉁이에서 벽제 소리가 요란히 나기 시작하였다.
"물렀거라, 비켜라! 에 - 이놈들, 모두 앉거라!"
그 요란스럽고 호기 있는 벽제 소리로 미루어, 어떤 권문의 행차인 것이 짐작되었다. 아직껏 깊이 머리를 가슴에 묻고 걷던 흥선은 그 머리를 번쩍 들었다.
분노에 불붙는 눈자위였다. 작은 몸집이나마, 초라한 행색이나마, 그 흥분된 눈을 치뜰 때에는, 그 눈에는 장래 이 삼백여 주를 호령한 운현 대감 이하응의 위엄이 드러나는 것이었다.
어떤 놈 - 이 벽제 소리 요란히 지나가는 놈은 또 어떤 놈이냐? 마주서서 욕하고 꾸짖을 신분은 못 되나마, 하다못해 벽제 소리를 향하여서라도 노염의 눈을 던져 보자는 것이었다.
행차는 가까워 왔다. 대제학(大提學) 김병학(金炳學)의 행차였다.
"자, 추운데 이 아래로 쑥 내려오시지요."
대제학 김병학의 사랑, 권하는 사람은 주인 병학이요, 권을 받는 사람은 파립폐의의 흥선이었다.
팽에게 받은 수모 때문에 머리가 거의 혼란하게 되었던 흥선은, 또한 이 뜻하지 않은 병학의 호의에 경이의 눈을 던지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야, 이 방에 불을 더 때라. 자, 대감 담배나 붙이시오. 여보게, 대감께 얼른 담배 붙여 올리게."
사면을 지휘하여 흥선을 환대하려는 눈치가 분명하였다. 그렇지 않아도 뜨거운 방에 불까지 더 때라고 야단이었다.
흥선은 눈을 들어 병학을 바라보았다. 상갓집 개와 같이 가는 곳마다 수모와 멸시만 받는 이 공자는 병학의 환대와 호의가 고맙기보다 오히려 무시무시하였다. 눈을 부릅뜨면 해라도 그 빛을 흐리게 할 만한 병학으로서, 아무 돌아볼 것이 없는 자기에게 이런 호의를 쓴다는 것이 흥선에게 있어서는 오히려 기적이었다.
흥선은 잠시 병학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주인의 명령에 의지하여 공손히 바치는 담배를 흥선은 받아서 피웠다. 가난에 가난을 거듭한 몇 해, 수수밭 귀퉁이에 심었던 쌍담배에나 익은 흥선의 입에는 좀 과히 독한 성천초(成川草)였다. 재채기가 나려 하였다.
"대감, 이즈음 어떠십니까?"
무슨 소리를 하느냐? 내 살림이 곤궁할 것은 너희들이 번히 아는 바가 아니냐? 내 쓴 갓을 보아라. 내 입은 옷을 보아라. 휘늘어진 비단옷에 싸인 병학을 흥선은 대답 없이 그냥 바라만 보았다. 그러나 대답 없는 그의 눈은 이렇게 말하였다.
'걱정 마오. 당신네의 덕분에 잘 사오. 딸 잘 둔 당신네 집안보다는 조상 잘 둔 우리 집안은 좀 못하기는 하지만 굶지는 않소.'
흥선의 입이 비로소 열렸다.
"조상이 막여(莫如) 딸이라--대감은 이런 쌍문자 아시오?"
비틀어진 미소 아래서 새어나온 물음이었다.
병학은 눈을 둥그렇게 하였다. 시정의 무뢰한 가운데 섞여서 시민들의 쌍말과 수담과 재담과 해학에 능한 이 타락한 공자의 기상천외의 질문은, 명문 김병학에게는 알지 못할 말이었다. 잠시 눈을 크게 하고 흥선의 얼굴을 바라본 뒤에 씩 웃고 말았다.
흥선의 입가에 떠돌던 비틀어진 미소는 드디어 홍소로 변하였다.
"하하하하! 조상이 막여 딸이라--하하하하, 하하하하!"
폭발된 노염 띤 홍소였다. 처치할 곳 없는 분노를 홍소로써 처치하려는 것이었다.
"하하하하, 하하하하! 대감 모르시는구려. 우리 쌍놈이나 알지 대감이 어떻게 그런 문자를 하시겠소?"
체기가 내려가는 것같이 흥선의 가슴은 얼마만치 시원하였다. 허리가 끊어질 듯이 웃고 있는 객과, 눈을 둥그렇게 하고 있는 주인 - 이 방에는 잠시 이상한 기분이 떠돌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