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모, 민 모, 홍 모, 조 모, 이 모, 지금의 세가요. 지금의 금만가인 수없는 사람의 이름과 형지가 어른어른 그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는 갔지만, 그 아무한테도 가서 지금 자기의 궁경을 호소할 곳이 있음직도 안했으며, 호소할지라도 그 호소에 얼마만큼이라도 동정하여 줄 사람은 절대로 없을 것이다. 부인에게 향하여 내일이면 되리라고 너털웃음으로 넘겨 버리기는 하였지만 그 내일 일이 딱하기 가이 없었다.

 

모든 일이 딱하고 기막힌 흥선은 다시 부인의 얼굴을 보지 않고 어서 자리에 들어갈 준비를 하였다.

 

이튿날, 이 파립폐의의 공자의 모양은 다시 거리에 나타났다. 상갓집 개와 같이 가는 곳마다 구박을 받는 이 공자는, 그래도 행여 구박하지 않는 고마운 세가가 하나 있지 않나 하여, 대목의 바람 찬 거리거리를 헤매고 있었다.

 

각 척신(戚臣)과 세가(勢家)며 노론(老論)·소론(少論)·남인(南人)·북인(北人)의 틈에 끼여서 돈 없고 세력 없는 이 공자는 기침 한번을 크게 할 수가 없고, 아무리 굶어 죽는다 할지라도 어디 가서 쌀 한 되를 청하여 볼 집이 없었다. 그러나 섣달 대목을 다하여 몰려올 빚쟁이도 피할 겸 부인에게 맹세도 한 체면상, 오늘은 어떻게 해서든 과세의 준비를 좀 해 가지고 들어가지 않으면 안 될 날이다.

 

'사람의 종자는 거리에 우글우글하되 나 갈 곳은 없구나!'

 

거리를 둘러보아서 수많은 사람들이 이리저리 바쁜 듯이 왕래를 하며, 벽제 소리 요란하게 저편 앞에는 어떤 세가의 행차가 지나가는 것을 볼 때에, 이 공자의 입가에는 쓴웃음의 자취가 스치고 지나갔다.

 

얼마를 거리를 헤매고 있던 이 공자의 작다란 몸집은, 그날 낮 좀 지나서 권문 팽 경장(彭景長)의 집 사랑에 나타났다.

 

"대감, 그간 무양하시오?"

 

인사를 하는 체면상 흥선의 얼굴에는 미소가 나타났다. 그러나 이제 바야흐로 안하지 않을 수 없는 창피하고도 괴로운 말 때문에 그의 미소의 뒤에는 고통의 그림자가 숨어 있었다.

 

두세 문객을 앞에 앉히고 아랫목 안석에 기대어 비스듬히 앉아 있던 경장은, 힐끗 눈을 굴려서 흥선을 바라보았다. 검은자위보다도 흰자위가 많은 눈찌였다. 무엇하러 왔느냐는 표정이었다.

 

그 경장의 흰 눈자위에 향하여 다시 한 번 미소하여 보이지 않을 수가 없는 흥선이었다. 흥선은 또 한 번 미소하였다.

 

"에이, 날도 지독히 춥게 되었습니다."

 

하면서 손을 비비며 웃목에 종그리고 앉았다.

 

지벌로 보아서 거기 있는 문객들은 당연히 흥선보다 아랫사람이매, 들어오는 흥선에게 대하여 당연히 인사를 하고 자리를 비키지 않으면 안 될 것이었다. 그러나 세가 팽 판서의 문객인 그들의 눈에는, 가난하고 세력 없는 이 공자는 사람으로 보이지조차 않았다. 한번씩 힐끗 돌아본 뒤에는 모두 흥선에게는 등을 지고 말았다.

 

팽도 무론 흥선을 대척하지 않았다. 두 번째 인사에 대하여 한 번의 대답도 안 하였다. 그리고 차디찬 일별을 다시 한번 흥선의 위에 던진 뒤에 둘러앉은 문객들과 아까의 이야기를 계속하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책망을 하지 않았겠소? 아 참, 어이가 없어서..."

 

무슨 이야기인지는 모른다. 좌우간 팽은 여기까지 이야기하고는 사뭇 우스운 듯이 하하하하 하고 웃었다.

 

둘러앉았던 무리들도 이 우습지도 않은 이야기에 허리가 끊어질 듯이 웃고들 있었다.

 

웃목에 종그리고 앉은 흥선은 이제 자기의 거취를 스스로도 알 수가 없었다. 이미 앉은 이상 이제 일어서서 다시 나갈 수도 없었다. 그러나 앉았자니 누구 하나 자기를 대척하여 주는 사람이 없었다.

 

도대체 경솔히 앉았던 것부터가 실수였다. 아니, 이 집에 들어온 것, 그보다 더 앞서서 누구의 힘을 힘입으려던 것부터가 실수였다. 이러한 냉대를 받을 것은 당연히 예측이 될 것이어늘, 구구히 남의 집을 찾을 생각을 내었던 것부터가 실수였다.

 

다시 일어설 수도 없고 그냥 앉아 있을 수도 없게 된 흥선은, 자기의 거취를 찾지를 못하고 다시 아랫목에서 계속되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지 않을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