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는 아직 어리지만(마음이 강직하기 짝 없는 이 호준의 눈에 들어 호준의 애서(愛?)가 된) 성하는 벌써 어른을 능히 잡아 먹을 만한 뱃심과 기백을 가졌던 것이었다. 이 성하가 흥선이라 하는 인물에게 호기심을 가지고 세밀히 관찰하고 연구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 결과, 몸을 의탁할 만한 사람이면 자기의 몸을 의탁하려고.
수일 전 성하가 흥선을 찾았을 때에 이런 말 저런 말 끝에, 흥선은 성하에게 한 가지의 일을 부탁하였다. 즉 다른 일이 아니라 성하가 조 대비께 뵐 기회가 있거든 그 때에 조 대비께 동궁 책립에 대한 의향을 내탐하여 달라는 것이었다. 세자 탄생을 기다리고 있는지, 혹은 종친 중에서 누구를 동궁으로 책립하려고 비밀히 그 인선을 하는지, 그것을 내탐하여 달라는 것이었다.
이야기의 머리를 교묘히 돌려서 얼른 듣기에는 무심히 하는 말같이 하였으므로, 성하도 그 날은 무심히 듣고 그럽시다고 응낙을 하였던 것이다. 오늘 탐춘을 겸하여 이 백악에 오른 것은 그 때의 그 부탁에 대한 회답도 겸하여서였다. 잠시 무거운 눈찌로 성하를 내려다본 다음, 흥선은 슬며시 머리를 돌렸다.
“자네게 한 꺼풀 감추는 것이 무엇 있나?”
“아니올씨다. 비록 아직 철 없는 성하입니다만 그만 눈치까지야 왜 없겠습니까?”
머리를 돌리고 있는 흥선의 눈은 경계하는 듯이 두어 번 섬벅거렸다. 섬벅거리던 눈이 굴러서 성하에게로 돌아올 때는, 거기는 기괴한 미소가 흐르고 있었다.
“나는 자네 말을 도무지 알 수가 없네. 그러면 이 흥선이 동궁이 되고 싶어 그런 운동을 하겠나? 당찮은…”
그 뒤를 이어서 흥선은 너털웃음을 웃었다.
그러나 성하는 보았다. 너털웃음으로 속여 버리려는 흥선이로되, 그 밑에 숨어 있는 커다란 실망을―성하의 회보에 어떤 기대를 분명히 품고 있다가, 시원하지 못한 대답을 듣기 때문에 초조해하는 것을―
“대감, 다시 말씀드립니다. 대감께서…”
그러나 흥선은 성하의 말을 듣지 않았다. 벌떡 일어섰다. 그리고 뒷짐을 지고 성하에게 등지고 두어 걸음 아래로 내려갔다.
“이러한들 어떠라리 저러한들 어떠하리 만수산 드렁츩이 얽혀진들 그 어떠하리―”
가느다란 소리로 그의 조상 태종이 고려 충신 정 몽주를 시험하던 시조를 읊어 보다가, 홱 몸을 성하에게 돌이키며,
“성하!”
하며 찾았다. 그 갑자기 찾는 흥선에게 황급히 성하가 머리를 들 적에 흥선은 말을 계속하였다.
“이러한들 어떠하리, 저러한들 어떠하리. 성하 자네는 아마 이렇게 생각하는 모양일세 그려? 상감께는 후사가 없으시겠다, 석파에게는 아들이 있겠다. 석파는 왕실 친척이겠다, 여차하면 석파의 아들이 동궁에 간택될지도 모르렷다, 이런 생각으로 내가 자네에게 그 당부를 한 것 같이―자네는 아마 이렇게 생각하는가 보이? 그러나 생각해 보게. 석파의 맏아들 재면이는 자네도 알다시피 천치야. 둘째아들 재황이도 애는 그다지 천치는 아니지만, 본시 천하게 길러나기 때문에 기역자 인 다리도 변변히 못 그리고, 장기라니 돈치기나 연 올리길세그려. 사기를 펴 보아야 돈치기 잘 하는 엿장사 흉내 잘 내는 임금이 다는 기록이 어디 있나? 나는 폐인, 술이나 먹고 투전이나 하고 쌈하다 매나 잘 맞고―그런 대원군이 있다는 기록이 어디 있나? 종실 친척이니깐 내가 동궁에 관해서 물어보면 자네는 그렇게 오해하기도 쉽겠지만, 나는 인젠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술망나니일시. 사십 년을 술과 투전으로 허송한 내가, 이제 늙마에 무슨 다른 꾀를 하겠나? 며칠 전에 자네에게 부탁했던 것은, 그저 말말 끝에 한 것이지, 무슨 다른 뜻이 없네. 인간 칠십은 고래희라는데, 반 팔십을 술로 허송을 했으니, 아아! 나는 과시 가련한 인생이로군―”
그 뒤에는 쓸쓸한 웃음―
“자, 한 잔 부어 주게. 모두 웃고 지낼 일일세. 나같이 웃고 지낼 일이야. 그 김가들한테 갖은 수모를 다 받기는 하지만, 그냥 모든 체하고 나 먹을 술이나 얻어 먹었으면 그뿐 아닌가? 수모한다고 가지를 않으면, 배 굶을 놈은 나뿐일세 그려. 안 간다고 그 놈들이 칭찬할 것도 아닐 일, 지근지근 찾아가면 공술잔이나 생기거든. 그것만해도 득이 아닌가?”
이런 말을 천연히 하는 흥선의 뱃속에 과연 별다른 배포가 있을까? 이것은 자기의 그 배포를 감추고자 하는 한 개의 연극일까? 성하는 차차 혼란되어 가는 마음을 억제하기 위하여, 잠자코 저편 아래 음침히 누워 있는 회색 바다―사멸의 도시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한참 잠자코 저편 아래만 내려다보고 있다가 상하는 드디어 한숨을 쉬었다.
“대감, 바른 대로 말씀드리리다. 어제 마마께 뵙고 동궁 간택에 관해서 어떤 의향을 갖고 계신지 대비마마의 의향을 여쭈어 보에 대하여 더니, 마마께서는 직접 거기 대해서는 아무 말씀도 안 계시고, 대감의 둘째도령 명복(命福―재황의 애명) 아기씨가 무슨 생이냐고 물으시기에 아마 금년에 열 살인가 아홉 살인가 된다고 여쭈었더니, 음영특하다는 말은 나도 들었다 하시고는 다른 말씀을 하시고 마십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