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
길고 음침한 겨울이 가고, 어디선가 한 마디 노고지리 소리가 들리는 듯하면, 이 땅에는 홀연히 봄이 이른다.
이 땅에 이르는 봄에는 준비 기간이 없다. 길고 음침한 겨울, 그리고 어둡고 쓸쓸한 겨울에 잠겨서, 긴 담뱃대를 벗삼아 시민들은 모두 안일의 꿈에 잠겨 있을 동안 성 밖에서 들려오는 소식에, 교외의 나뭇가지가 윤기가 돌기 시작한다는 기별이 들리는 듯하면, 이 땅에는 홀연히 봄이 이르는 것이었다.
서울의 집 제도는 방 안에 해가 미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남향으로 마루가 달리고, 방이라는 것은 마루를 통해서야 간접으로 바깥과 연하였는지라, 세상을 골고루 비치는 햇볕도 겨우 이 집의 마루를 스치고 지나가는 뿐, 방 안에는 들어올 기회가 없다.
해를 볼 수 없는 방 안―이 음침한 방 안에서 시민들은 길고 긴 겨울을 장죽을 벗삼아서 기름때 흐르는 얼굴에 눈만 반짝거리면서, 언제나 봄이 이를까 고대하면서 지낸다.
근방의 산을 모두 벗겨 온 수많은 솔잎이 연기로 화하여 시민들의 엉덩이 아래를 지나서 굴뚝으로 하여 하늘로 사라진다. 이 많고 많은 연기 때문에, 집이란 집, 기둥이란 기둥, 벽이란 벽은 겨울을 지내는 동안은 모두 시꺼멓게 덜민다. 기다랗고 시꺼먼 추녀 아래로 겨우 조금 내다보이는 하늘을 바라보면서 어버이, 자식, 오라비, 누이 할 것 없이 혈색 나쁜 얼굴들이 한 방에 모여서 우글거리는 모양―그것은 흡사히 그림의 연옥이다. 높은 집을 허락하지 않고 높은 문을 허락하지 않기 때문에, 작다랗고 낮게 지은 집 안에는 비교적 거대한 체격의 주인인 시민들이 들썩거린다.
이 시민이 가진 집에는 뜰이 없고, 뜰이 있을지라도 나무가 없다. 이층집에서 생활할 권리가 없는 이 시민의 집들은 만약 어떤 사람이 있어서 높은 곳에서 굽어 본다할지면, 일면이 거무튀튀한 먹물의 바다일 것이다. 거무튀튀한 기와와 검게 덜민 초가 지붕이 잇달리고 또 잇달려서, 이 시민의 가진 좁다란 길이며 좁다란 뜰은 추녀 끝에 가리어서 보이지도 않고, 고저(高低)가 없는 평균한 지붕 아래 감추어져 있는 이 시민의 생활처는 물결도 없는 커다란 먹물 바다일 것이다.
사멸(死滅)의 거리―이 거리에서 아침과 저녁에 불을 때느라고 뭉겨 오르는 연기만 없으면, 이 거무튀튀한 먹물 바다 아래 '사람의 생활'이 있으리라고는 누구나 뜻도 못할 것이다. 낙타(駱駝), 백련(白蓮), 목멱(木覓), 인왕(仁旺), 백악(白岳)의 등걸 속에 보호되어 있는 오십리 평방의 이 먹물 바다―그 안에는 오 서(署), 사십구 방(坊), 삼백 사십 동(洞)이 벌여 있고, 이십만의 생령이 그 속에서 사람의 가지의 희, 노, 애, 낙의 온갖 감정을 호흡하며 생활하리라고는 과연 몽상 외의 일일 것이다.
가늘고 기다란 담뱃대, 가늘고 기다란 목을 가진 술병, 가늘고 고불고불하고 기다란 거리의 길, 이것들은 모두 가늘고 약한 생활을 경영하는 이 시민의 심볼이다. 막걸리의 힘을 빌지 않고는 마음대로 크게 웃을 권리도 없고, 권리가 있을지라도 웃을 만한 기꺼운 일도 없고, 어둡고 음침한 생활만 계속되는 것이다.
이씨 사백 년 간, 그 동안에 한양은 망하였다. 어떤 사람이 어서 한양 사람에게,
“너희는 돈 버는 방법을 아느냐?”
는 질문을 던질 것 같으면, 그들은 서슴지 않고 대답하리라.
“안다. 먼저 벼슬을 해야 한다. 그 뒤에 토색을 하면 저절로 돈이 생긴다.”
라고―음침한 방 안에서 장죽을 물고 이 시민들이 꾸는 꿈은 이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