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이 이씨 조선의 창업을 자랑하는 찬란한 궁궐도, 임진왜란 때에 그만 불을 일으켜서 거진 타 버렸다. 그 뒤에 중수를 하였지만, 그 뒤부터는 역대의 상감을 혹은 창덕궁이나 창경궁, 경운궁, 경희궁에 기거를 하고 경복궁은 빈 궁으로 지냈다.

 

'사멸의 도시' 한양부는 폐허가 된 고궁 때문에 더욱 쓸쓸히 보였다. 여기저기 무너진 돌담 틈으로는 잃어버린 연(鳶)을 잡으러 드나드는 소년의 무리까지 있었다.

 

봄―

 

이 도시를 둘러싼 높고 낮은 뫼에는 봄의 다사로움이 찾아왔지만, 사멸의 도시와 폐허에 가까운 고궁에는 쓸쓸한 봄이 찾아왔다. 그것은 쓸쓸하기 짝이 없는 '정숙의 도시'였다. 외국인이 명명한 바, '은사국인(隱士國人)'의 생활과 어울리는 외로운 거리였다.

 

왕도를 한양에 정하면서 왕실의 위엄을 백성들에게 보이기 위하여 꾸민 이씨 조선의 궁궐이 얼마나 찬란하였는지, 우리는 우리의 조상의 기록을 보기보다 오히려 남의 손으로 된 기록을 살펴 보자.

 

임진왜란 때에 왕은 멀리 북으로 피하고, 빈 한양에 입성한 왜장 가운데 나베지나 나오시게(鎬島直茂)의 기록을 보면 이러하다.

 

“조선 왕성의 형세 장관은 진실로 사람의 이목을 놀라게 한다.

 

그 동으로 흐르는 강을 여강(麗江)이라 하고, 서으로 흐르는 강을 서강(西江)이라 하고, 남으로 흐르는 강을 한강(漢江)이라 하며, 북쪽에 있는 산을 북산(北山)이라 하고, 남쪽에 있는 산을 남산(南山)이라 하고, 서북쪽에 있는 산을 삼각산(三角山)이라 한다. 이 세 산에 둘린 그 사이를 산마루며 골짜기를 타고 칠 리가 넘는 성을 돌로 쌓아서 그 가운데를 낙중(洛中)이라 한다.

 

북산 아래는 남면(南面)하여 자궁(紫宮)이 있고 돌을 아로새겨서 그 벽을 만들었다. 무슨 전(殿) 무슨 각(閣) 그 수효를 셀 수 없고, 맑은 시내가 서으로 흐르는 그 위에는 돌 다리를 걸고 난간 기둥으로 석련화(石蓮華)를 세웠다. 다리의 좌우에 돌 사자(獅子) 네 마리를 안치하고 그 중앙에 여덟 자의 돌담을 쌓고 그 네 귀에는 또한 돌 사자 네 마리를 장식하였다. 그 뒤에 자진, 청량(紫震, 淸凉)의 두 전각이 있는데, 역시 돌로 기둥을 삼고 사면에는 상룡 하룡을 새기고, 유리(璃瑠)로써 기와를 만들고, 그 꼭두머리에는 청룡(靑龍)을 두르고, 금은으로 판을 만들어 붙이고, 주옥으로 장식하고, 천장과 네 벽에는 오색 필채로써, 기린, 봉황, 공작, 용호 등을 그리고, 층계에는 가운데는 돌봉황을 새기고 좌우에는 돌 학을 깔았다.

 

왕성의 형세 언어에 절하여 선경(仙境)이나 용궁성(龍宮城)이라고나 감히 칭할까. 낙인(洛人)이 말하기를 이 곳은 경기도의 감영으로 이백 오십 년 전에 개성서 이리로 옮겨 한양부라 부른다―”고.

 

소박(素朴)한 당시 일본의 성시를 보아 온 일본 장수들이, 오색이 영롱한 궁궐에 얼마나 놀랐는지는 짐작할 수 있다.

 

이렇듯 찬란하던 궁궐도 임진란 때에 불을 일으키고 그 뒤 얼마만큼 중수는 하였지만, 오랫동안 우로에 젖고 또 젖어서, 이제는 보잘 나위도 없게 되었다.

 

지금의 종친으로 뉘라서 이 고궁을 보고 다시 돌이켜서 옛날 태조의 위업을 생각할 때에 한 줄기의 눈물이 없이 지날 수가 있으랴!

 

왕실의 위신은 땅에 떨어지고 외척들만 세를 쓰는 지금의 세상에, 이 고궁을 돌아볼 자 누구며, 이 고궁을 간수할 자 누구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