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선은 이 말을 들었는지? 적어도 귀담아 들었는지 성하의 이야기를 듣는 듯 안주만 연하여 집어먹고 있었다. 만약 흥선으로서 뱃속에 어떤 다른 배포라도 갖고 있다 하면, 승하의 이 말은 결코 거저 넘기지 못할 말이었다. 지금 종실의 어른이요, 세자 책립을 종묘에 복고할 자격을 가진 유일 인인 대왕대비가, 흥선의 둘째아들의 영특하다는 소문을 들었다 하는 것은 중대한 의의를 가진 것으로서, 이것이 실마리가 되어 장래 어떤 방면으로 사건이 진전될지, 그것은 예측도 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주의하여 들으면 이런 중대한 의의를 가진 말이 승하의 입에서 나왔거늘, 그것을 당연히 들었을 흥선은 못들은 체하고 그냥 술에만 정신을 두는 것이었다.
만약 흥선으로서 그 말을 듣고도 심상히 여긴다면, 흥선은 세상이 전하는 바와 같이 별로 속도 없는 한 치인에 지나지 못할 것이다. 흥선이 성하의 말을 듣고 그 말의 의의를 알고, 그리고도 이렇듯 표면 천연히 '술밖에는 자기를 끄으는 아무 물건도 세상에 없다'는 듯이 자기의 온갖 감정과 표정을 죽여 버리는 것이라면, 흥선은 사람의 상식으로 판단할 수 없는 무서운 인물이었다.
아직껏 흥선의 마음을 따져 보기 위하여 감추어 두었던 진상을 흥선에게 말하고, 거기서도 아무런 결과를 얻지 못한 성하는, 흥선의 얼굴에 움직이는 표정이라도 보려고, 눈을 들어서 흥선의 얼굴을 보았다. 그러나 흥선의 얼굴에는 여전히 아무 표정도 보이지 않고, 일심불란히 질긴 편포만 씹고 있는 것이었다.
경하는 흥선을 진맥하기를 드디어 단념하였다. 오래 사귀는 동안―그리고 자기의 심경을 모두 흥선에게 사뢴 뒤에 저절로 차차 알아질 것이지, 흥선과 같은 수수께끼의 인물을 단시간 내에 알아내려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한 일일 줄을 깨달았다. 조급히 알려면 알려느니만큼 부득요령의 결론밖에는 얻을 수가 없을 것이고, 그러면 지금 세상이 흥선을 비평하는 비평 이상으로 흥선을 알지 못할 것을 알았다.
흥선을 단시일 간에 알아보려던 노력을 포기한 성하도, 흥선을 본떠서 땅에 편 암주 보자기에서 편포를 한 조각 찢어서 입에 넣고 후물후물 씹기 시작하였다.
봄날 따스한 볕은 이 두 불우(不遇)의 공자 위에 고요히 내리비치고 있었다.
흥선과 조성하가 백악에서 내려온 것은, 봄날의 짧지 않은 해가 멀리 인왕산 마루에 넘실넘실할 저녁때였다. 사멸의 도시 한양도 겨우 움직이기 시작하여, 집집마다 뽑아 내는 저녁 연기가, 가뜩이나 거무튀튀한 이 도시를 더욱 음침하게 만들고, 많은 부엌 며느리들은 시민의 양식을 준비하느라고 분주히 왕래할 때였다.
산에서 내려올 때에 흥선은 먹다 남은 부스러기 안주를 모두 다시 보자기에 싸서 간수하였다. 남은 부스러기라 하나, 마른 안주 몇 점밖에 없는 것을 찬찬히 싸서 그것을 허리에 찼다. 가난에 젖은 흥선으로서는 예사로이 하는 노릇인지 모르지만, 같이 일반으로 부유히 지나지 못하는 조성하의 눈에조차 창피한 노릇이었다.
성하는 흥선 댁까지 흥선을 모셔다 드렸다. 그리고 잠시 들어와서 저녁이나 같이 하고 가라는 것을 사양하고 흥선 댁 문 밖에서 흥선께 하직하였다.
싱거운 답청(踏靑)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삼삼오오 짝을 지어 하인들을 뒤에 달고 흥그러이 취하하여 사인교에 몸을 싣고 돌아오는 이 날에, 흥선과 성하는 똑똑한 정신으로 (흥선조차 그리 술도 먹지 않고) 다시 아침에 떠났던 이 도시로 돌아온 것이었다.
흥선을 흥선 댁으로 들여보내고 혼자 된 성하는, 처음에는 그냥 집으로 돌아갈까 하였으나, 마음이 유난히 뒤숭숭한 것이 집으로 돌아가기도 싫으므로, 그의 발에 온 권리를 맡겨서 지향 없이 거리거리를 헤매기 시작하였다.
흥선이라 하는 수수께끼의 인물에 대한 의문이 그의 온 머리를 덮었다.
단지 한 술망나니에 지나지 못할까? 그렇지 않으면 세상을 감쪽같이 속이는 놀라운 명우(名優)일까? 단지 한 주착 없는 술군으로 보잘 때에는, 그 의견을 부인하는 몇 가지의 증거가 그의 머리에 휙휙 지나갔다. 자기의 장인 이호준은 강직하고 사람을 볼 줄 아는 인물이다. 그 이 호준이 침이 마르도록 칭찬할 적에는, 칭찬할 만한 무슨 곡절을 가졌을 것이다. 정월 초승, 성하 자기와 오서도 반해 조 대비께 잠행을 했을 때도, 단지 주착 없는 술군일지면 거기서 망신스런 몇 가지의 행동을 하였을 것이다. 그런데, 그때 흥선의 언행은 비록 궁중 예의에는 벗어난 일을 하였을지라도, 눈을 찌푸릴 만한 망신스런 행동은 하지 않았다. 야인비례(野人非禮)라고 너그러이 볼 만한 행동은 하였지만, 더러운 인물로 볼 만한 미루한 행동은 하지를 않았다. 권문 김씨를 앞에서 늘 흘리던 비굴한 미소도, 조 대비의 앞에서는 흘리지 않았다. '하하하하!'그 때의 야인의 야성적 웃음을 궁중 예의에는 벗어났을지 모르나, 어디까지든 호활하고 천진한 야인이었다.
―흥선군은 소문과 달리 재미있는 사람이라.
고 조 대비도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할 만큼, 그는 첫눈에 대비의 마음을 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