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지라, 뒷날 문종과 단종의 대를 지나서 이씨 조선 대흥의 명군 세조가 등극을 하고서, 무능하고 무책하고 지벌 권세만 자랑하자는 모든 왕족이며 대신을 모조리 없이할 때에도, 양녕대군뿐은 그 화를 면할 뿐 아니라, 틈이 있을 적마다 세조는 친히 양녕대군을 청하여서 그의 의견을 묻는 것이었다.
치인이란 일컬음을 듣고 글을 싫어하였다는 기록을 남긴 양녕의 숭례문 현판의 필적은 뚜렷이 이 도시의 출입구인 남대문에 걸려서, 이래 사 백년 간 그 아래를 통과한 수 없는 사람에게 그 호활한 필적을 자랑하는 것이었다.
황혼의 남대문을 장식한 옛날 현인의 필적을 우러러 볼 동안, 젊은 성하의 눈 가에는 감격의 엷은 눈물까지 보였다. 치인의 형세를 하고 미친 사람의 형세를 하여, 그 한때 생애를 모호히 한 옛날 현인 양녕대군의 필적을 우러러볼 때에 성하의 머리에 다시금 떠오르는 것은 흥선의 인격이었다. 양녕이 미친 행세를 할 때에, 뉘라서 그것을 한낱 연극이라 간파하였나?
'讓寧雖失德廢嗣 晩年能隨時自晦'
라 하여, 젊은 시절의 실덕을 모든 사가는 시인하였다.
그것을 연극으로 보지 않았다.
“술망나니!”
“주착 없는 인물!”
“투전군!”
“비루한 사람!”
“치인!”
“상갓집 개!”
이런 수 없는 창피한 명칭으로 불리면서도, 그래도 그것을 싫다 하지 않고 그냥 지근지근 대관들을 찾아 다니는 흥선은, 사실에 있어서 치인으로 볼 인물일까, 혹은 옛날의 양녕과 같이 어떤 필요상 자기의 신분과 패기와 포부와 심정을 남에게 감추기 위하여―그리고 감춤으로써 자기의 일을 성공시키기 위하여 세상을 모호히 하는 술책으로 볼 것인가?
―대감! 대감의 심성을 이 성하에게뿐은 감춤 없이 알려 주십시오. 성하는 영리하옵니다. 영리하면서도 또한 신과 의를 지킬 줄을 아옵니다. 지금 상서롭지 못한 세상―종실의 권위는 발 아래 떨어지고 외척들 때문에 삼천리의 강토와 수천만의 생령은 도탄의 괴로움에서 우옵니다. 종실 가운데서 한 현인이 나타나서 큰 청결을 하지 않으면, 가까운 장래에는 이 나라가 꺼져 없어질 모양이옵니다.
―대감! 대감은 과연 현인이옵니까? 혹은 세상이 인정하는 바와 같이 한 개의 치인에 지나지 못하옵니까? 만약 대감으로서 사실에 있어서 현인이시고, 지금의 대감의 하시는 일이 모두 신분을 모호히 하시기 위한 술책이시라면, 성하에게만은 대감의 심정을 일러 주십시오. 성하 비록 어리고 무력하오나 대감의 앞에서 최후의 힘까지 다 쓰오리다.
황혼의 남대문―벌써 꽤 어두워서 눈에 힘을 주지 않으면 잘 보이지 않는 현판을 우러러보며, 성하는 얼빠진 사람 모양으로 우두커니 서 있었다.
옛날 현인의 휘호한 활달한 필적은 이 성하의 마음을 알아보는지 모르는지, 여전히 커다랗게 걸려서, 그가 사백 년에 가까운 세월을 자기의 아래를 통과한 수 없는 사람을 굽어 본 그런 무표정한 태도로 성하를 굽어 보고 있었다.
근 반각이나 그 아래 서 있다가 성하가 자기의 무거운 발자국을 뗄 때는, 성하의 양 뺨에는 희미하나마 눈물이 흐른 자취까지 있었다. 이십만의 인구를 감춘 장안은 고요히 고요히 밤의 장막 안으로 기어 들어갔다. 밤은 차차 전개되려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