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멸의 도시 한양에서 주인 없는 이 고궁은 나날이 더덜미고 쓰러져 간다. 태조 업을 일으키고 한양에 도읍을 정하였음은, 당신의 후손으로 하여금 오늘날 이렇듯 영락에 울게 하고자 하였음은 아니거늘―
이 쓰러져 가는 고궁과 사멸의 도시를 눈 아래 굽어볼 수 있는―한양의 정기를 한 몸에 지니고 있는 백악에도 봄이 이르렀다.
필운대의 살구꽃도 북문의 복사꽃과 홍인문 밖의 버들을 화류장(花柳場)으로 꼽고, 봄이 되면 삼삼오오 때를 지어 그리로들 놀러 가지만, 아무도 돌아보지 않는 백악바위 틈에도 진달래는 송이송이 봄빛을 자랑하고 있었다.
이 백악의 평탄한 한 군데를 자리잡아 가지고, 앞에 간단한 주안을 벌여 놓고 봄을 따려는 두 사람의 탐춘객이 있었다. 사멸의 도시를 눈 아래 굽어 보기가 싫어서 모두들 다른 데로 봄을 탄상하러 가는데, 이 탐춘객은 남들이 찾지 않는 백악을 답청장(踏靑場)으로 삼고 여기서 봄을 즐기는 것이었다. 한 사람은 사십이 조금 넘음직한 중늙은이, 또 한 사람은 겨우 소년의 영역을 벗어난 열 칠팔 살의 청년―
그들의 앞에는 간단한 주효가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술도 들지를 않았다. 잠시 동안을 두 사람은 각각 제 생각만 하는 듯이 온통 회색 지붕 아래 감추어져 먼지만 무럭무럭 울리는 정숙의 도회를 굽어 보고 있었다.
한참 아래만 내려다보고 있다가 중노인이 스스로 술을 한 잔 부어서 들이켰다. 그리고 그 잔을 보자기 위에 도로 놓으며 비로소 입을 열었다.
“여보게, 성하! 어디 자초지종을 다 한 번 다시 말해보게.”
청년은 조심하였다. 그리고 성하와 마주 앉아 있는 사람은 타락된 공자 흥선군 이하응―
한참 저편 아래만 내려다보고 있던 성하는, 그 눈을 굴려서 흥선을 쳐다보았다. 흥선은 음침한 얼굴로 비기어 성하의 얼굴은 광채가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나이의 차이의 탓뿐이 아닌 듯하였다.
“아까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상세히 여쭈어 보지 못했습니다.”
“왜?”
“며칠 전에 대감께 그 분부를 듣잡고 어제 대비마마께 가서 그 말씀을 여쭈어 보았더니, 마마께서는 너는 왜 당찮은 말을 묻느냐고 하시는데 무어라고 더 여쭈어 보겠습니까?”
“그럼…”
흥선은 무슨 말을 곧 하려 하였다. 그러나 잠시 주저하였다. 주저한 뒤에 드디어 그 말을 하였다.
“그럼, 달리 돌려서라도 여쭈어 볼 게지.”
“어떻게 말씀이오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