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사멸의 도시(死滅都市) 한양은, 본시 고구려 때에는 북한산군(北漢山郡)이었다. 신라 경덕왕(景德王) 때에 이르러서 비로소 한양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고려초에는 다시 이름을 양주(楊舟)라 고쳤다가, 고려 문종 때에 남경(南京)으로 삼고 목멱산에 궁궐까지 짓게 하고 충렬왕 때에 또 다시 이름을 한양이라 정한 것이다.

 

중 도선(道詵)의 예언에,

 

“장차 이씨가 왕이 되고 도읍을 한양에 정하리라.”

 

하는 말이 있었으므로, 고려 역대의 임금은 이것을 몹시 꺼리어서, 고려 숙종 때에 윤 관 등을 보내서 자세히 한양의 지세를 탐사시켰다. 그 결과에 의지하여 삼각산이 남산으로 뻗어 내려온 만경대의 한 줄기 백악(白岳)이, 도선의 비기(秘記)에 말한 바 그 곳이라 하여 이 곳에다가 오얏나무(李木)를 많이 심고, 이씨 성 가진 사람을 남경 부윤으로 보내고, 숙종왕은 매해 한 번씩 남경부에 순행하며, 남경부에 심은 오얏나무가 무성하면 잘라 버리고 무성하면 잘라 버리고 하여 이 한양주의 왕기(王氣)를 꺾기에 노력하였다.

 

이씨 조선의 역대 이 성계, 처음에는 고려의 궁궐인 수창궁에서 즉위하였지만, 고려의 구도에는 그냥 고려 왕조에 마음두는 구신들이 많으므로 도읍을 옮기기로 작정하고, 그 후보지로서 처음은 계룡산을 택하고 대궐 기공까지 하였다가, 계룡산은 그 지형이 좁고 토지가 더럽고 교통이 불편하고 물길이 멀어서 못 쓴다는 유근(柳覲) 등의 의견을 좇아서 한양으로 도읍을 고쳐 정하기로 하였다.

 

도읍을 한양으로 옮김에 임하여 태조는 정 도전(鄭道傳) 등에게 명하여함께 좋은 자리를 잡아서 대궐을 짓게 하였다. 삼각산이 흘러서 백악이 된 그 아래, 높기가 삼십 척의 돌담에 둘린 웅대한 궁궐―

 

基數移住 旣飽以德

 

君子萬年 介爾景福

 

이라는 글에서 따낸 경복궁이 이것이었다.

 

연침(燕寢)은 강녕전(康寧殿)이라 명명하고, 동소침(東小寢)은 연생전(延生殿), 서소침(西小寢)은 경성전(慶成殿)이요, 연침의 남쪽에는 사정전(思政殿)이요, 그 앞에는 근정전(勤政殿)이요, 근정문이 근정전의 정면을 장식하고, 융문융무(隆文隆武)의 두 문이 동서에 있고―동남서북의 큰 문은 동을 건춘(建春), 서를 영추(迎秋), 남은 광화(光化), 북을 신무(神武)라 하고, 각 문에는 누각이 있어서 그 위엄을 자랑하여,

 

“오 보에 일루(一樓)요 십 보에 일각(一閣)이라.”

 

는 아방궁은 따르지 못하지만, 이 삼천리의 통수자의 궁궐로서 부끄럼이 없도록 찬란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