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된지라, 소위 양반의 자손들은 무과에 급제를 하는 것을 부끄러운 일로 알았다. 어느 보국 댁 어느 숭록(崇祿) 댁 몇째 아들이 무과에 급제를 하였다 하면(애당초에 가지도 않거니와) 그들은 피하고 머리를 돌리고 하였다. 여기 따라서 문과에 급제를 한 사람들의 긍지는 차차 높아 갔다.

 

―과거에 급제하였다!

 

이 말은 본시는 문무를 구별하지 않았던 것이었지만, 차차 어느덧 문과에 급제를 하였다는 뜻으로 해석되게 되었다. 무과 같은 것은 양반의 바라는 바가 아니었다. 상놈들의 등용문이었다.

 

이렇듯 문과에 급제하는 것을 존중히 여기는 시대가 오래 계속되었다. 문과에 급제를 한다는 것은 온 백성의 바라고 희망하는 바였다.

 

문과에 급제한다는 일이 그렇듯 명예스러우니만큼 그 전형에 있어서 첫째도 지벌이요 둘째도 지벌이요 세째도 지벌이요, 무엇보다도 지벌이었다. 지벌이 나쁘면 제 아무리 재간이 비상하다 하더라도 절대로 급제를 하지 못하였다. 지벌이 나쁘기 때문에 무관이 하대를 받느니만큼 문관 등용에 있어서는 첫째도 둘째도 지벌이었다. 지벌이 급제의 제일 요소였다. 그리고 그것이 제일 요소인지라, 급제한 사람의 코는 더욱 높았다. 문과에 급제를 한다 하는 것은, 그 사람의 지벌이 좋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므로였다.

 

그 자랑스러운 '문관'이라는 열매도 이즈음에 이르러서는 차차 따기가 쉽게 되었다. 어중이떠중이도 '문관'이라는 열매를 능히 딸 수가 있게 되었다.

 

영의정 하옥 김좌근(領議政荷屋金左根)

 

하옥 김좌근은 현 왕비의 아저씨였다. 세도 김병기는 하옥의 양아들이었다. 대제학 영초 김병학(大提學穎樵金炳學)이며, 훈련 대장(訓練大將) 영어 김병국(穎漁金炳國)은 모두 그의 조카였다. 영흥 부원군(永興府院君) 김문근(金汶根)(현 왕비의 친정 아버지)이며 김 현근(金賢根), 김흥근(金興根) 등이 모두 그의 일족이었다. 하옥은 이 당당한 일족의 그 어른 격이었다. 몸이 영의정이며 그의 아들이 세도인지라, 다른 일족이 없을지라도 그 세력은 무서울 것이다.

 

하옥에게는 앙씨라 하는 애첩이 있었다. 본시 나주 기생으로서, 출신이 기생이니만큼 간교하고 요염하여, 늙은 하옥을 마음대로 놀렸다.

 

하옥이 양씨를 위하여 집을 수리할 때의 일이다. 안방에서 긴 담뱃대를 피우고 있던 양씨는 갑자기 하옥을 안방으로 청하였다. 양씨의 명령에 의하여 하옥은 호인다운 미소를 얼굴에 띄워 가지고 안방으로 들어갔다.

 

“우리 나주 합하(羅州閤下)께옵서 왜 또 불러겝시나?”

 

벙글벙글 웃으면서 마루에 와 걸터앉은 하옥에게 향한 양씨의 눈찌는 그다지 곱지 못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