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병기는 굳이 흥선에게 한 폭 그려 주기를 당부하였다. 사양하는 흥선에게 부디 그려 달라고 몇 번을 간청하였다. 여기서 흥선은 병기의 간청에 응하였다. 자기를 만나면 독설로서 자기를 늘 비웃기만 하던 병기가 오늘따라 유쾌히 다소를 하면서 그 위에 그런 간청을 하는 것이 흥선에게는 고마웠던 것이다.

 

“변변치는 못한 재간이나마 일간 하나 가져오리다.”

 

이렇게 약속하였다.

 

병기는 흥선의 가사 형편도 물었다. 언제 보니까 매우 총명하여 보이던 둘쨋 도령 재황이 잘 자라느냐고도 물었다. 흥선을 위하여 병기는 주안까지 차렸다. 그리고 흥선이 사랑하는 기생 계월이도 주석의 흥취를 돋구고자 불러 왔다.

 

어젯밤에도,

 

“아예 김 판서 댁에는 이후에는 가시지 마세요.”

 

하고 당부당부하였거늘, 그 이튿날인 오늘 또한 김 판서댁에 와서 술을 얻어 먹는 흥선을 계월이는 몰래 눈을 흘겨보았다. 흥선은 그것을 보기는 보았다. 그러나 모른 체하고 외면하여 버렸다.

 

흥선은 밤이 매우 깊어서 병기의 집에서 나왔다. 자기의 타는 사인 남녀를 빌려 주려는 것을 굳이 사양하고 흥선은 어둡고 추운 밤의 거리에 나섰다.

 

인정에 약한 흥선은 오늘 몇 시간의 병기의 환대 때문에 그 사이 깊이깊이 마음에 새기었던 병기에게 대한 원한의 절반을 잊었다. 그리고 술에 취한 흥그러운 마음으로 콧소리를 하면서 교동 병기의 집에서 바로 건너편인 자기의 집으로 비틀비틀 돌아왔다. 벌써 거의 반원(半圓)에 가까운 달이 하늘 높이 희미하게 걸려 있었다. 정월 초순 어떤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