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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날은 유달리 병기는 유쾌한 모양이었다. 흥선을 보기만 하면 그의 입에서 연하여 나오던 독설도, 이 날은 한 번도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가장 가까운 벗과 같이 흥선과 담소하였다.
이 유쾌한 듯한 병기의 태도 때문에 흥선의 가슴에 뭉켜 있던 덩어리도 얼마만큼 삭아졌다. 병기의 말마따나 상갓집 개와 같이 가는 곳마다 수모만 받고, 만나는 사람에게마다 구박만 받아 오던 흥선은, 이렇듯 자기에게 격의 없이 대하여 주는 사람을 보면 그것이 비록 어젯날까지의 원수라 할지라도 그의 마음은 봄날 눈과 같이 녹아 버리는 것이었다.
“대감, 난초를 잘 그리신다더군요? 그런 기예는 언제 배우셨소?”
병기는 이런 말을 물었다. 거기 대하여 흥선은 겸손하였다.
“잘 그리기야 무얼 잘 그리겠소? 아이들 장난과 같은 것이…”
“어제도 그런 이야기가 났었는데, 탈속(脫俗)을 한 솜씨라던데요? 그런 특기를 가지셨을 줄은 몰랐소이다.”
“특기가 다 뭐오니까. 노는 틈틈이 장난삼아 배운 노릇―남에게 말하기조차 부끄럽소이다. 그 서투른 재간을 그래도 보아 주는 이가 있어서 때때로는 술값이나 됩니다.”
“한 폭 이 병기를 위해서 휘호해 주시지 못하겠습니까?”
흥선은 눈을 들어서 병기의 얼굴을 보았다. 자기를 놀리려는 것이 아닌가 하여서―그러나 병기의 얼굴에는 그런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대감께서는 그런 서투른 것이 아니라도 벽장 속에 진품이 많고 많을 터인데, 그런 변변치 않은 것은 드리기조차 부끄럽소이다.”
흥선은 이만큼 사양하여 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