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명히 난초 그것의 기교는 이전 것만 썩 못하다. 흥선 자기로도 그것은 알 수가 있었다. 그러나 기교 그것이 전엣 것만 못하다 할지라도 전엣 것보다 흥선의 마음에는 더 드는 병풍이었다. 이것보다 더욱 좋은 난초를 보낼지라도 알아볼 병기가 아니요. 단지 되는 대로 먹으로 끄적거리어 보낸다 할지라도 역시 알아볼 병기가 아닌지라, 아무런 병풍을 보낼지라도 '보냈다'는 명색 이상은 될 것이 없으되, 그림 자체로 보아서 ×판서 댁에 보낸 병풍보다 썩 낫게 되었다. 그것을 못하다 감정한 응원을 흥선은 다시 미소로써 돌아보았다.
“못해도 할 수 없지. 또 다시 새로 만들자면 돈이 또 삭고…”
흥선은 몸을 일으켜서 병풍 가까이 가서 한 번 다시 병풍을 훑어 본 뒤에 찬찬히 접었다. 그리고 응원에게 명하여 잘 싸게 하였다. 겨울 날의 짧은 해는 차차 서편 창으로 기울어졌다. 부엌 며느리들은 저녁을 지으러 부엌으로 나설 때다. 병기에게 난초 병풍을 보낸 삼사 일 뒤에 흥선의 작다란 몸집은 또 다시 병기의 집 문을 두드리는 자기를 발견하였다.
며칠 전에 그렇듯 자기의 난초를 칭찬하던 병기인지라 병풍을 보냈으면 당연 기뻐할 것이며 그것이 기쁠 것 같으면 당연히 자기를 환대할 것이며, 자기를 환대하면 그 꼬리에 무슨 좋은 떡이라도 달려 있지나 않을까―이런 막연한 희망을 가지고 병기의 댁을 찾게 된 것이었다.
“일간 무양하시오?”
이런 때에 늘 얼굴에 떠오르는 비굴한 미소를 또 띄어 가지고 흥선이 이렇게 인사할 때에 병기는 책상을 앞에 놓고 앉아서 무슨 글을 읽고 있다가 머리를 조금 들어서 흥선을 본 뒤에 같이 상례도 하지 않고 머리를 끄덕할 뿐이었다. 그리고 다시 읽던 책으로 눈을 떨어뜨렸다.
가련한 공자 흥선―그는 며칠 전에 병기에게 난초 병풍을 선사하였는지라, 자기가 오기만 하면 병기는 당연히 기뻐서 맞아 줄 줄 알았다. 예기에 반하여 들어서는 참 차디 찬 눈찌를 본 흥선은 얼굴에 나타내었던 비굴한 미소를 걷어 치웠다. 그리고 주인이 지시도 하기 전에 발치로 들어가서 덜썩 주저앉았다.
병기는 눈을 굴려서 다시 한 번 흥선을 보았다. 그리고 그 시간조차 아깝다는 듯이 눈을 급히 도로 보던 책으로 옮겼다. 한참 책만 들여다보고 흥선의 존재는 모른 체하고 있던 병기의 얼굴에 빙긋이 미소가 흘렀다. 책에 무슨 미소할 만한 말이라도 있는 모양이었다. 기회를 기다리던 흥선은 이 모시에 달려 늘어졌다.
“무슨 책이오니까?”
병기는 눈 가에 그냥 미소를 띈 채 힐끗 흥선을 보았다. 그리고 대답 대신으로 책을 조금 들어서 그 뚜껑을 흥선에게 보여 주고는 눈을 도로 책으로 떨어뜨렸다.
'금병매(金甁梅)'였다. 손님이 와도 모른 체하고 병기가 일심불란히 들여다보고 있는 책은 무슨 귀중한 학문 경전이나 시서가 아니요, 한 개의 소설 비사였다. 그 소설에 열중하여 손님이 와도 모른 체하고 그냥 버려 둔 것이었다. 병기에게 있어서는 흥선 따위는 보통 사람의 축에 넣을 가치조차 없었다. 며칠 전에 조롱삼아 흥선의 난초를 칭찬은 하였지만, 그 뒤에 곧 그것을 잊어버린 그는, 그 뒤 흥선에게서 난초의 병풍이 왔다는 보고를 듣고는 그 병풍을 청지기에게 주어 버리고, 벌써 그의 기억에서 사라져 버린 것이다. 마치 그에게 매일 들어오는 많은 선사품을 일일이 기억할 수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흥선의 온 정신을 박은 병풍 따위는 벌써 그의 기억에서 사라져 버린 것이다.
흥선의 얼굴에는 다시 비굴한 미소가 나타났다. 그 비굴한 미소에 어울리는 비굴한 말조차 그의 입에서 나왔다. 병기의 비위를 조금이라도 맞추어 보려고, 마음에 없는 말로 '금병매'가 재미있다는 이야기를 두어 마디 하여 보았다. 그러나 이 때에 병기는 흥선의 말을 듣지도 않았다. 그리고 정신을 집중하여 가지고 '금병매'를 읽었다. 병기의 비위를 맞추느라고 중얼거리는 흥선의 말은 단지 병기의 독서를 방해하는 데 지나지 못하였다.
한 두어 마디 헛소리를 하다가 이 낌새를 보고 흥선도 입을 봉하여 버렸다. 묵연히 앉아서 소설을 읽고 있는 병기의 곁에 흥선도 묵연히 앉아서 허리만 좌우로 젖고 있었다.
불쾌한 기분이 흥선의 머리를 뒤흔들었다. 그러나 호소할 곳이 없는 불쾌였다. 제 아무리 병기가 소설만 읽고 자기를 안 돌아본다 할지라도 그것으로 나무람은 할 수 없는 처지였다. 석양녘까지 흥선은 묵묵히 앉아 있었다. 병기도 때때로 담배를 붙일 때만 몸을 움직이고는 다시 책을 보고 하였다.
흥선은 드디어 병기에게서 병풍에 대한 사례를 못 들었다. 사례가 나오면 거기 매달려서 무슨 다른 말을 꺼내려던 흥선은 그 말을 꺼낼 기회조차 없었다. 석양녘까지 묵묵히 앉았다가 집으로 돌아가려고 몸을 일으킬 때는, 흥선은 울고 싶은 듯한 또는 노여운 듯한 기괴한 감정 때문에 (작별에 임하여 반드시 나타내야 할) 비굴한 미소조차 안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