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초도 꽤 잘 치신다지요?"
"뉘께서 들으셨습니까? 무재한 흥선―무엇 하나 잘 하는 것이 있겠소이까? 서울서 매맞고 송도서 주먹질이라고, 가슴 속에 엉긴 울분을 종이 위에 뿌려 보는 뿐이옵니다."
"가야금도 잘 하신다구?"
"대비마마, 너무 추어 주시지 마세요. 본디 재간 없이 태어난 흥선이올씨다. 사십 년 동안을 술로써 세월을 허송한 뿐이올씨다."
이단자 부랑자로서 궁중에 알려져 있는 이 흥선에게 대하여 대비의 흥미는 차차 더하여 갔다. 내리에 드나드는 특권을 가지고 있는 내시(內侍)들이며 종친들만 익히 보고, 그들의 꽁한 태도와 점잔을 빼는 꼴들로서, 세상의 사내라는 것이 모두 그렇게 생긴 것쯤으로 여기고 있던 대비는 여기서 색채 다른 인물을 보았다.
"하하하하!"
흥선이 소리를 높여서 웃을 때에 이 건축한 이래로 문소리 한 번 요란히 여닫겨 본 적이 없는 방을 드렁드렁 울렸다. 대비가 얼굴에 미소를 띄고 이 이단자의 약점을 들어서 물을 때는 사십이 지난 중년 사나이는 마치 어린애와 같이 머리를 긁으며 싱그레 웃었다.
만약 흥선으로서 이 날의 이 회견을 기회로 장래에도 늘 대비께 출입을 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하면 그것은 흥선의 성공이었다. 구중 깊은 속에서 너무도 규칙적이요 단조한 생활에 염증이 난 대비는 이 불기호방한 흥선의 언행이 마음에 들었다.
겨울의 밤도 어지간히 깊어서 좀 조급한 닭은 벌써 첫 홰를 보할 때쯤 돼서야 흥선은 대비께 하직하였다.
돌아가는 흥선에게 대하여 대비는, 이 뒤에도 특별히 허가가 없이 자유로이 대비께 뵈러 올 특권을 주었다.
"이 뒤에도 간간 오오. 종반끼리 서로 교제라도 있어야지, 너무도 남같이 지내니까 일가 같지를 않구료."
아직껏 다른 종친에 대하여 내려 보지 않은 이런 친절한 말을 흥선에게 준 것이었다.
"아아, 실컷 잘 웃었다. 재미있는 사람이지?"
금침을 준비하는 시녀에게 향하여 몇 번을 대비는 미소로써 이런 말을 하고 하고 하였다.
이 호준에게 새 옷을 얻어 입고 오지 않고 헤어진 옷에 깨진 갓으로 왔더면, 흥선은 대왕대비의 흥취를 더욱 돋굴 뻔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