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임은 눈을 깜박깜박하고 듣다가,

“우루사이 온나다나”

'귀찮은 여자를 다 보겠다'하고 상을 찡그리며 일어서더니, 무엇을 생각했는지 '이리 나오라'고 해서, 영신을 밖으로 불러내었다.

'옳지 인제야 면회를 시켜 주려나 보다'하고 영신은 우선 가슴이 설레는 것을 진정시키며 주임의 뒤를 따랐다.

그러나 영신이가 끌려들어간 곳은 햇빛도 새어 들어 오지 않는 음침한 조그만 방인데 무시무시한 기구가 놓인 것을 보아 취조실인 것이 틀림없었다.

주임은 묻는 대로 모든 것을 속이지 않고 저저히 대며는, 면회를 시켜 주겠다고 달래기도 하고, 위협도 해 가면서 동혁이와의 관계며 어떻게 연락을 취해 가지고 무슨 일을 해 온 것까지 미주알 고주알 캐어묻는다.

배에 휘둘리고 먼길을 걸어와서 두세 시간이나 뜻밖의 취조를 받기는 실로 참기 어려운 고통이었다. 그러나 영신은 흥분하는 것이 불리할 줄 알고 될 수 있는 대로 냉정히 대답을 하면서도, '단순히 방화 범인을 숨겼다는 것이 아니고, 무슨 다른 사건이 있는 줄로 지레 짐작을 하고서 이러는 게 아닐까? 이번 기회에 생트집이라도 잡으려는 게 아닐까?'하니 말대답하기가 여간 조심스럽지가 않았다.

마주앉은 사람의 얼굴이 보이지 않을 만큼이나 어두운 뒤에야 취조가 끝이 났다. 주임은 그제야,

“그럼 면회는 내일 아침에 시켜 주지.”

하고 한 마디 던지고 나가버렸다.

기름이 졸아붙는 남포불을 돋워가며 잠을 이루지 못하는 겨울 밤은 길기도 길었다.

일부러 경찰서와 담 하나를 사이에 둔 여관에 들어서, 동혁의 괴로이 내쉬는 입김이 유치장의 철창을 새어, 저의 폐 속까지 스며드는 듯, 영신의 솜같이 풀어진 온몸의 세포는, 눈에 보이지도 않는 액체로 스스로 녹아버리는 듯하다.

천 갈래 만 갈래로 흐트러지는 심사를 주워 모을 길 없어서, 잠이나 억지로 들어보려고 미지근한 방바닥에 늘어지면, 마룻바닥에 얇다란 담요 한 자락을 뒤집어쓰고, 새우잠을 자는 사랑하는 사람이 눈앞에 어른거린다. 온돌에 누웠기가 몸이 근지럽도록 미안쩍은 생각이 들어서, 영신은 다시 일어나 앉기도 몇 번이나 하였다.

빠듯한 노자에서 사식이라도 차입할 생각을 하다가 새벽녘에야 간신히 눈을 붙이려는데, 주정꾼들이 바로 옆방과 문간방으로 우르르 몰려 들어왔다. 수작하는 것이 군청패나 경찰서측 같은데, 계집을 하나씩 끼고 와서 추잡한 소리를 하며 떠들어대어서 간신히 청한 잠을 또다시 놓쳐 버렸다.

…뒤숭숭한 꿈자리에서 눈을 떠보니 어느덧 날이 밝았다. 영신은 잔입으로 출근 시간이 되기를 기다려 경찰서로 갔다.

취조를 해보니, 사실 별일은 없는데, 언질을 잡힌 터이라, 고등계 주임은 마지못해서 면회를 허락하였다. 취조실 문이 열리는 소리에 바작바작 졸이고 섰던 영신의 가슴은 달칵 내려앉았다.

옷고름을 떼어버린 솜 바지저고리를 비둔하게 입고, 떡 들어서는 동혁이! 그 얼굴에는 반가운 웃음이 가득 찼다.

“내 오실 줄 알았지요. 엊저녁 꿈에…”

하고 달려들어 악수를 하려다가 곁에 붙어선 형사를 흘끗 보고는 물러섰다. 영신은 너무 반가와서 말문이 꽉 막힌 듯 눈물이 핑 돌아 가지고 입술만 떠는 것을 보고 동혁은,

“영신 씨 같은 여자도, 이런 자리에서 눈물을 보이나요?”

하고 너그러이 웃는 입모습으로 나무라듯 한다. 동혁의 태연자약한 태도와 얼굴빛을 보아, 가장 염려했던 일은 당하지 않은 줄 알고, 영신은,

“얼마나 고생이 되세요?”

하고 그제야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고생이랄 게 있나요. 아무 것도 듣고 보질 않으니까 되려 편한데요. 조용히 생각할 기회도 얻었구요.”

하고는 영신의 아래위를 훑어본다.

“아직도 건강이 전만 하려면 멀었는데 또 무리를 하셨군요. 그래 언제 떠나세요?”

“떠나기 전에 뵙고 가려고 왔다가, 한곡리서 하룻밤을 자고 왔는데 차마 나 혼자 어떻게…”

“천만에, 내 걱정은 조금도 하지 말고, 오늘이라도 떠나세요. 공부는 둘째 문제고, 우선 정양을 하실 필요가 있으니까 당분간 청석골을 떠나실밖에 없지요. 그러면 자연 기분전환도 될 수 있을 테니까요. 어디서든지 그저 건강에만 힘을 써 주세요. 우리의 장래 일은 나간 뒤에 의논합시다.”

“그 일이 급하겠어요? 그저 속히 나오기만 빌지요. 나 때문엔 너무 염려하지 말아 주세요. 힘 자라는 데까지는 조섭을 할 테니까요. 그렇지만 또 어느 때나 만나게 될지…”

영신은 고개를 돌리며 눈물을 깨문다.

“사실 아무 일도 없어요. 하지만 동화가 어디로 간 걸 알 때까지는 나가지 못할 것 같으니까, 좀 오래 걸릴 것도 같아요. 아무튼 나가는 대로 곧 전보를 치지요. 그 때까지 맘 놓고 기다려 주세요.”

하면서도 동혁은 여전히 참기 어려운 마음속의 고민을 웃음으로 싸서 보이려고 애를 쓴다.

“그럼 나오신 뒤엔 어디서 만날까요?”

살아 생전 다시는 만나 보지 못할 것처럼 영신의 표정은 전에 없이 애련하다.

“우리의 일터에서 만나지요. 한곡리하고 청석골하고 합병을 해놓고, 실컷 맘껏 만납시다.”

하는데, 동혁은 등을 밀리었다. 형사가 잠깐 돌아선 사이에, 동혁은 영신의 손을 덥석 잡았다. 두 사람의 혈관이 마주 얽혀서 떨리는 듯한 악수의 순간!

“허어, 손이 이렇게 차서…”

동혁은 입 속으로 부르짖고 다시 한번 가냘퍼진 영신의 손을 으스러지도록 쥐고 흔들다가, 두 번째 등을 밀려서 그 손을 뿌리치며, 홱 돌아섰다.

유치장으로 통한 복도의 콘크리트 바닥에 영신의 눈물이 방울방울 떨어져서 돈짝만큼씩 번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