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도내만 해도 농지령이 실시된 뒤에 소작쟁의(小作爭議)의 건수가 불과 오 개월 동안에 천여 건이나 되는 것을 보아 짐작할 수가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지주나 소작인이 함께 살려면, 적어도 한 십 년 동안은 소작권을 이동시키지 말고 금년에 받은 석수로 따져서 도지로 내맡길 것 같으면, 누구나 제 수입을 위해서 나농(懶農)을 할 사람이 없을 겝니다. 이만한 근본책을 실행하지 못하면 농촌 진흥이니 자력 갱생이니 하는 것은 모두 헛문서에 지나지 못합니다.”
하고 주먹으로 테이블을 탁 치고는,
“이 밖에 우리 남쪽 조선에밖에 없는 양반과 상놈을 구별하는 케케묵은 습관과 관혼상제의 비용을 절약하는 것 등, 하고 싶은 말씀이 많습니다마는 한꺼번에 실행하기 어려운 문제일 것 같아서 그것은 뒤로 미루겠습니다.”
하고 후일을 기약한 후 단에서 내려섰다.
밤은 자정이 넘은 지도 오래다. 초저녁에는 여기저기 머슴사랑에서,
“의이잇, 모다 - ”
“이이키, 걸이다 - ”
하고 미친놈이 생침을 맞는 듯한 소리를 지르며, 장작윷을 노느라고 떠들썩하더니, 밤이 으슥해지며 한 집 두 집 불이 꺼지고 지금은 큰마을 편에서 개짖는 소리만 이따끔 컹컹컹 들릴 뿐…
날은 초저녁보다 강강한데, 싸락눈이 쌀쌀하게 뿌리기 시작한다. 회관 앞에 심은 전나무 동청나무의 잎사귀는 점점 백발이 되어 간다. 대보름 달은 구름 속에 잠겨 언저리만이 흐릿한데, 그 사이로 유난히 붉은 빛이 도는 별 서넛은, 보초병의 눈초리처럼 날카로이 땅 위에 깊이 든 눈밤을 감시하는 듯.
새로운 간판이 걸린 회관 근처는 인가와 멀리 떨어져서 무섭도록 괴괴한데, 위 아래가 시꺼먼 사람이 성큼성큼 올라온다, 장성이 세지 못한 사람이 마주쳤다가는 '에그머니!' 하고 소리를 지를는지도 모른다. 시꺼먼 사나이는 눈 위에 기다란 그림자를 이끌고 올라오다가 우뚝 서서 좌우를 둘러보고 인기척이 없는 것을 살피고서야 달음질을 해서 올라 간다.
기다란 그림자는 휘젓한 회관 뒤로 돌아갔다. 조금 있자 난데없는 불이 확 켜지더니 그 불덩어리는 도깨비불처럼 잠시 왔다갔다하다가 새빨간 불꽃이 뱀의 혀끝처럼 날름거리며 추녀 끝으로 치붙어오른다.
그 때다. 검은 그림자가 올라오던 길로 조금 더 큰 시꺼먼 그림자가 쏜살같이 치닫는다. 회관 뒤꼍에서 큰 그림자는 작은 그림자를 꽉 붙잡았다.
“너 이게 무슨 짓이냐?”
형은 아우의 손목을 잡았다. 석유에 담근 솜방망이에 불을 붙여 추녀 끝에다 대고 섰던 동화는, 불빛에 머리끝이 쭈뼛하도록 무섭게 부릅뜬 형의 눈을 힐끔 쳐다보았다.
“이까짓 놈의 집 뒀다 뭘 허우?”
그의 입에서는 술 냄새가 훅 끼쳤다.
“이리 내라!”
동혁은 아우의 손을 비틀어 솜방망이를 꿰어 든 작대기를 빼앗아 던지더니 눈바닥에다 짓밟아 껐다.
그러고는 아우를 꾸짖을 사이도 없이 철봉을 하듯 몸을 솟구쳐 창 틈을 붙잡고 지붕으로 올라가려다가 추녀 끝이 잡히지 않으니 까, 다시 쿠웅 하고 뛰어내려서, 굴뚝으로 발돋움을 하고 지붕 위로 올라가더니,
“얘, 흙이라도 끼얹어라. 어서 어서!”
동혁은 나직이 호통을 하며, 새집막이 속으로 불어당긴 불을 사뭇 손으로 몸뚱이로 비벼서 간신히 껐다. 그동안 동혁의 동작은 비호같이 날래다. '불야!' 소리를 지르거나, 샘으로 물을 푸러 간다든지 해서, 소동을 일으킬 것 같으면, 아우가 방화범이 되어 잡혀갈 것이 아닌가.
초저녁에는 강도사집 마당에서 젊은 사람들이 편윷을 놀았었다. 기천이가 새로 선거된 임원들을 불러 저녁을 먹이는데, 동화가 술이 취해 가지고 달려들었다.
“어째서 나 하나만 따돌리느냐? 너희놈들버텀 의리부동한 놈들이다.”
하고는 작대기를 들고 회원들을 닥치는 대로 두들겨패고,
“너 이놈, 강 기천이 나오너라! 네깐 놈이 회장이 되면 난 도지사 노릇하겠다. 너 요놈, 땀 한 방울 안 흘리고 우리 회관을 빼앗아 들어?”
하고 소리를 벽력같이 지르며 사랑으로 뛰어드는 것을 동혁이와 정득이, 갑산이가, 간신히 붙들어다가 집으로 끌고 가서 눕혔었다.
동화가 미친 사람처럼 날뛰는 바람에 윷놀이판은 흐지부지 흩어지고, 겁이 나서 안방으로 피해 들어갔던 기천은 동화가 끌려간 뒤에야 나와서,
“그렇게 양반을 못 알아보고 폭행을 하는 놈은, 한 십 년 징역을 시켜야 한다.”
고 이빨을 뽀드득뽀드득 갈며 별렀다.
동혁은 어찌나 속이 상하는지 아우를 퍽퍽 두드려 주고 싶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아우의 정열과 혈기를 사랑하는 터이라 일찌감치 집으로 돌아와서,
“어서 자거라! 과부집 수캐 모양으로 돌아댕기며 일만 저지르지 말고…넌 술 때문에 큰 코를 한번 다치구야 말리라.”
하고 곁에 누워서 이 생각 저 생각을 하던 끝에, '떠나기 전에 꼭 한번 만나야겠는데…'하고 영신의 생각을 하다가 잠이 어렴폿이 들었었다. 그러다가 자는 체하던 동화가 슬그머니 빠져나간 것을 헛간에서 덜커덕거리는 소리로 알고, 깜짝 놀라 뛰어나가서 뒤를 밟았던 것이다.
동혁은 온통 거멍투성이가 되어 씨근거리며,
“얘 누가 알았다간 큰일난다. 큰일나!”
하고 쉬이쉬이하며 아우의 손목을 잡아 끌고 내려오는데, 뜻밖에 등뒤에서,
“거기서 뭣들을 하셨에유?”
하는 소리가 들렸다. 형제는 머리끝이 쭈뼛해서 멈칫하고 서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석돌이의 목소리인 것이 틀림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