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덧 해가 바뀌어 음력으로 정월이 되었다. 학원은 구습에 의해서 일주일 동안 방학을 했지만, 명절이라 해도 계집아이들이 울긋불긋한 인조견 저고리 치마를 호사라고 입고 세배를 다닐 뿐, 흰 떡 한 모태 해 먹는 집이 없어, 떡치는 소리 대신에 여기저기 오막살이에서 널을 뛰는 소리만 덜컹덜컹 하고 들린다... 한곡리에는 풍물이나 장만한 것이 있어 청년들이 두드리지만 그만한 오락기관도 없는 청석골은 더한층 쓸쓸하다...


연일 눈이 쏟아지다가 햇발이 퍼져서 땅은 질척거려 세배꾼들의 모처럼 얻어 입은 때때옷 뒤와 버선이 진흙투성이다.

지붕에 쌓인 눈이, 고드름과 함께 추녀 끝으로 녹아내려 뚜욱뚜욱 떨어지는 소리를 들으며, 영신은 책상 앞에 턱을 고이고 앉아서 생각에 잠겼다. 의식적으로는 센티멘탈리즘(哀傷主義)을 송충이와 같이 싫어하면서도, 소복을 잘 못해서 건강이 전처럼 회복되지 못한 탓인지, 고요한 시간만 있으면 저의 신세가 고단하고 공연히 서글픈 생각이 들어 저도 모르는 겨를에 눈물이 흘러내리는 때가 있다.

'동혁씨 말마따나 아까운 청춘을 이대로 늙혀서 옳은가? 인생이란 본시 이다지도 고독한 것인가?' 하고 스스로 묻기도 하고 한숨도 짓는다.

'왜 너에게는 박 동혁이가 있지 않느냐. 그 튼튼하고 믿음성스러운 남자가 너의 장래를 맡지 않았느냐?'

'그렇다. 그와 평생의 고락을 같이할 약속을 하였다. 나는 그이를 이 세상의 누구보다도 사랑한다. 열렬히 사랑한다. 그러나 결혼을 한다고 나 한 몸을 그에게 의지하려는 것은 아니다. 밥을 얻어먹고 옷을 얻어 입고 자녀를 낳아 주기 위한 결혼을 꿈꾸는 것은 결단코 아니다.

두 사람이 육체적으로 결합이 된대도 내가 할 일이 따로 있다. 이 현실에 처한 조선의 인텔리 여성으로서 따로이 해야 할 사업이 있다. 결혼이 그 사업을 방해한다면 차라리 연애도 결혼도 하지 말아야 한다. 청상과부처럼 미스 빌링스처럼 독신으로 늙어야만 한다.'

'그러나 외로운 것을 어찌하나. 이다지도 지향없이 헤매는 마음을 어디다가 붙들어 맨단 말이냐?'

'너에게는 신앙이 있지 않으냐. 어려서부터 하나님을 불러 왔고, 그의 독생자에게서 희생과 봉사의 정신을 배웠고, 가장 어려울 때와 괴로울 때에, 주를 부르며 아침저녁 기도를 올리지 않았느냐'

'그렇다. 그러나 이제 와서는 무형한 그네들을 믿는 것만으로는 도저히 만족할 수가 없다. 사람을 믿고 싶다! 육안(肉眼)으로 보이는 좀더 똑똑한 것, 확실한 것, 즉 과학을 믿고 싶다! 직접으로 실험할 수 있는 것을, 노력하는 정비례로 효과를 눈앞에 볼 수 있는 그러한 일을 하고 싶다!'

영신은 마음 속의 문답을 제 귀로 들을수록 생각은 갈피를 잡을 수 없다. 그는 퇴원을 한 후에 달포나 누웠다 일어나 보니, 학원 일은 청년들만 맡겨 놓아서 뒤죽박죽이다. 그밖에도 부인들의 모임이나 모든 것으로 보아, 그네들의 손으로 자치를 해 나가려면 아직도 이삼 년 동안은 열심으로 지도를 해 주어야만 될 것 같다.

영신은 더 누웠을 수가 없었다. 몸은 조금만 과히 움직이면 수술한 자리가 당기고 아픈 것을 억지로 참고 하루 몇차례씩 학원으로 오르내렸다. 이것저것 분별을 하고 돌아다니려면 자연히 운동이 과도하게 되고, 따라서 한번 쓰러지면 일어날 수가 없도록 피로하였다.

'이러다가는 안 되겠다. 어쨌든 내 몸이 튼튼해지고 볼 일이다'

하면서도 타고난 그의 성격이 가만히 앉아 있지를 못하게 한다.

“아뭏든 이번 기회에 눈 딱 감고 건너가서 공부를 하고 돌아오자. 나만한 지식으로 남을 지도한다는 것부터 대담하였다. 양심에 부끄러운 일이다.”

하고 다시 한번 청석골을 떠날 결심을 하였다.

'동혁씨는 왜 온다온다 하고 선문만 놓고 아니 올까. 또 동네에 무슨 일이 생겼나?'

하고 별별 생각을 다 해 보다가,

'서울서 노자가 오는 대로 음력 보름께 쯤 떠날 예정이니 그 안에 꼭 와 달라'고 편지를 썼다.

다시 한번 만나서 전후 일을 의논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 동안 기천이는 장근 두 달째나 누워 있었다. 병을 앓는 것이 아니라, 타동에 나가서 양반자세를 하다가, 임자를 톡톡히 만나서 졸경을 쳤는데, 골통이 깨어지고 가슴에 담이 들어서 꼼짝 못하고 누워서 음력 과세를 하였다.

회장이 된 첫 번 행세를 하려고 제 동네서는 못해도 저도 돈 십 원이나 기부를 한 읍내 소방조 출초식(消防組出初式)에 참례를 했다가, 술이 엉망진창으로 취해서 자전거를 끌고 오다가 신작로가에 있는 주막으로 비틀거리며 들어갔다.

계집이라면 회를 치려고 드는 기천은 그 주막 갈보의 소위 나지미상(단골)이었다. 술김에 더욱 안하무인이 된 기천은 제가 맡아 놓은 계집이라, 기침도 안하고 방문을 펄썩 열었다. 허술하게 박은 돌쩌귀가 떨어지면서 문은 덜커덕 열렸다. 방은 캄캄하다.

“옥화야!”

“…”

대답이 없다. 기천은 구두를 신은 채 방으로 들어서며 성냥불을 확 켰다. 옥화란 계집은 발가벗은 몸을 불에 덴 벌레처럼 옴츠려뜨리는데, 커다란 버선발이 이불 밖으로 쑥 비어져 나왔다. 동시에 만경을 한 듯한 기천의 눈에는 질투의 불길이 타올랐다.

“누구냐?”

소리를 버럭 지르며 이불을 홱 벗겼다.

“이놈아, 넌 누구냐?”

감때가 사납게 생긴 사내는 벌떡 일어났다.

기천은 그자의 얼굴을 보고,

“이놈 너 용준이 아니냐? 발칙한 놈 같으니라구, 너 이놈 양반을 못 알아보고, 내가 다니는 집인 줄 뻔히 알면서 이 죽일 놈 같으니…”

기천의 구두발길은 대뜸 용준이라고 불리운 사내의 허구리를 걷어찼다. 그 다음 순간 기천의 눈에서는 번갯불이 번쩍하였다. 따귀를 한 대 되게 얻어맞고, 정신이 아뜩해서 쓰러지는 것을 그 왁살스러이 생긴 사내는,

“요놈아, 술 파는 계집꺼정 다 네 계집이냐? 타동에 와서도 양반 행세를 해? 너 요놈 함부로 어따가 발길질을 하는 거냐?”

하고 호통을 하더니,

“아무튼 잘 만났다. 양반의 몸뚱이엔 매가 튈 줄 아느냐?”

하고 기천의 멱살을 바싹 추켜잡고, 컴컴한 마당으로 끌고 나가더니,

“너 요놈의 새끼, 네놈의 집 머슴살이 삼 년에 사경도 다 못 찾아 먹고 네게 얻어맞고서 쫓겨난 내다. 어디 너 좀 견디어 봐라.”

하고 마른 정강이를 장작개비로 패고, 발딱 자빠뜨려 놓고는 발뒤꿈치로 가슴을 사뭇 짓밟았다. 기천은 말 한 마디 못하고 깩깩거리며 죽도록 얻어맞는 것을 계집이 버선발로 뛰어내려가서 간신히 뜯어 말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