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원 선거에 들어가, 동혁은 차점인 관계로 부회장 겸 서기로 지명이 되었다. 그러나 동혁은 나이도 젊고 강씨처럼 재산도 없을 뿐 아니라 아무 이력도 없다는 이유를 내세워 끝까지 사퇴를 하였다.
서기가 되는 것만 하더라도 이 회관을 같이 지은 농우회의 회원 열 두 명을 전부 역원으로 뽑아 주지 않으면 나 홀로 중요한 책임을 맡을 수가 없다고 끝까지 고집을 해서 기어이 농우회 회원들이 실지로 일을 할 역원의 대다수를 점령하게 되었다. 오직 동화가 역원이 되는 것만은 회장과 구장이 극력으로 반대하여서 보류하기로 되었고, 늙은 축에는 교풍부장(矯風部長) 같은 직함을 떼어 맡겼다.
회가 흐지부지 끝이 날 무렵에야, 동혁은 서기석에서 천천히 일어섰다. 회원들의 박수소리가 일제히 일어났다.
“대동의 여러분이 한자리에 모이신 기회에, 잠시 몇 마디 여쭈어 두고 싶은 말씀이 있습니다.”
우렁찬 목소리와 위풍이 있는 동작에 장내는 물을 끼얹은 듯이 조용해졌다. 그의 곁에 쪼그리고 앉은 기천의 존재가 납작해질 만큼이나 동혁의 윤곽은 큼직하였다.
“우리 동네에는 오늘부터 진흥회라는 것이 생겼고, 강기천 씨와 같은 유력하신 분이 회장이 되신 것은 피차에 경축할 만한 일이겠습니다. 저 역시 서기 겸 회계라는 책임을 지게 되어서, 두 어깨가 무거운 것을 느끼는 동시에, 여러분께서는 과거에 오랜 역사를 가진 농우회를 사랑하시던 터이니까, 앞으로도 더욱 편달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하고 여러 사람의 앞으로 한 걸음 다가서며, 그 검붉은 얼굴이 매우 긴장해진다. 내빈들은 물론 기천이도 동혁의 입에서 무슨 말이 떨어질지 몰라서 노랑수염을 배배 꼬아 올리며 눈만 깜박깜박하고 앉았다.
동혁은 여러 사람의 주목을 한 몸에 받으며,
“여러분, 여러분은 우리 동네에도 진흥회가 생긴 까닭과, 진흥회란 무엇을 하는 기관이라는 것은 면장께서 자세히 설명하신 것을 들으셨으니까 잘 아실 줄 압니다. 그러나 남이 시키는 대로 덮어놓고 복종하는 것보다 우리들의 일은 다른 사람의 손을 빌지 말고 자발적으로 해야만 합니다. 이것이 진정한 의미의 자력갱생(自力更生)입니다!
그러려면 우리 농촌에서 가장 폐단이 많은 습관과 우리의 생활이 이다지도 빈곤하게 된 까닭이 도대체 어디 있나? 하는 것을 냉정하게 생각해 보고, 그것이 그른 줄 깨닫고, 그 원인을 밝힌 다음에는, 즉시 악습을 타파하고, 나쁜 일은 밑둥부터 뜯어고치기 위해서 용기를 내어야 합니다.
누가 무어라든지 용단성 있게 싸워 나가야만 비로소 우리의 앞길에 광명이 비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농촌이, 줄잡어 말씀하면 우리 한곡리가, 무엇 때문에 이렇게 가난한가! 손톱 발톱을 닳려 가며 죽도록 일을 해도, 우리의 살림살이가 왜 이다지 구차한가? 여러분은 그 까닭이 어디 있는 줄 아십니까?”
하고 대답을 기다리는 듯이 장내를 둘러보더니,
“그 까닭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큰 까닭은, 이 자리에서 말씀하기가 거북한 사정이 있어서 저부터도 가려운 데를 버선등 위로 긁는 것 같은 느낌이 없지 않습니다마는, 가장 직접으로 우리네같이 없는 사람들의 피를 빨아가는 것이 무엇인 줄 아십니까?”
하고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첫째는 고리대금업자입니다.”
여러 사람의 시선은 말끔 새로운 회장의 얼굴로 쏠렸다.
“옳소 - ”
그것은 갑산의 목소리였다. 저녁때가 되니까 창밖에는 바람이 일어, 불김이 없는 회관 안은 냉기가 돌건만, 누구 하나 추워하는 눈치가 보이지 않는다.
동혁은 신중히 말을 이어 고리대금업자의 발호(跋扈)와 간교한 착취 수단으로 말미암아 빈민들의 고혈이 얼마나 빨리우고 있나 하는 것을 숫자를 들어가며 폭로하고,
“앞으로 진흥회 회원은 과거에 중변으로 쓴 돈도, 금융조합에서 놓는 저리(低利) 이상으로 갚지 말고, 더구나 회의 책임자로는 절대로 돈놀이를 해먹지 못할 것을 이 자리에서 맹세하고 또 실행해야 합니다.”
라고 부르짖은 다음 목소리를 떨어뜨리더니,
“오늘 회장이 되신 강기천 씨는, 우리 농우회원들이 진 여러 해 묵은 빚을 변리는 한푼도 받지 않으시고 깨끗이 탕감해 주셨습니다.”
하고 증서를 내보이면서,
“이번 기회에 그 갸륵한 처사를 여러분께서도 칭송하실 줄 아는 동시에, 강기천 씨는 이번에 진흥회장이 되신 기념으로 여러분의 채권까지도 모조리 포기하실 줄 믿고, 조금도 의심치 않는 바입니다.”
하고는 슬쩍 기천을 흘겨본다. 이번에는 산병전(散兵戰)을 하듯이 여기저기 끼어 앉은 회원들이 마루청을 구르며 손뼉을 쳤다.
기천은 사람을 바로 볼 용기가 없는 듯이, 실눈을 감아 아랫입술만 자근자근 깨물고 앉았다. 팔짱을 꼈다 손을 옆구리에 찔렀다 하는 것을 보면, 앉은자리가 바늘방석 같은 모양이나 체면상 퇴석은 하지 못하는 눈치다.
동혁은 말에 점점 열을 띠우며, 고리대금과 다름이 없는 장릿벼를 놓아 먹는 악습까지 타파하라고, 강도사 집과 그밖에 구장과 같은 볏섬이나 앞세우고 사는 사람들에게 역시 세밀한 통계를 뽑은 것을 읽으며 경고를 하였다. 그 중에는 행전에다가 댓님을 친 것만큼이나 켕겨서 슬금슬금 꽁무니 빼는 사람이 있는 것을 보고 동혁은 꾸짖듯이,
“안직 회가 끝나지 않았쇠다. 이것은 우리 같은 없는 사람들의 생사가 달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문젠데 무단히 퇴장하는 사람이 누굽니까?”
하고 회관 안이 찌렁찌렁 울리도록 소리를 질렀다. 그 바람에 담배를 태우는 체하다가 다시 들어오는 사람은 모두 양반 행세를 하는 갓장이들이다.
기천은 날도 저물고 하니, 말을 간단히 하라고 주의를 시키려다가, 동혁에게 우박을 맞을까 보아 내밀었던 고개가 옴찔하고 들어갔다. 실상인즉 기천이가 진흥회장을 버느라고 갖은 수단을 다 쓴 것은 그것이 무슨 명정감이나 되는 듯이 명예심이 발동한 까닭도 있거니와, 그보다도 취리와 장리를 놓는 데 편의를 얻고 진흥회장이라면 무슨 권세가 대단한 벼슬로 여기는 백성들에게 위엄을 부려 재산을 늘이는 간접적 효과를 얻어 보려는 계획이었다.
그러던 것이 관공리들과 동민들의 눈앞에서 동혁의 입으로 구린 밑천이 드러나고, 여러 사람의 결의에 복종하지 않을 수도 없는 처지를 당하고 보니, 참말로 입맛이 소태같았다.
그 눈치를 모를 리 없는 동혁은, '할말은 다해 버리고 말 테다'하고 시꺼먼 눈동자를 굴리더니,
“또 한 가지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빚을 갚고, 장릿벼를 얻어먹지 않게 된대도 지금처럼 논 한 마지기도 제것이 없어 가지고는 도저히 먹고 살 도리가 없습니다. 아무리 농사를 개량한대도 지주와 반타작을 해 가지고는 암만해도 생계를 세울 수가 없지 않습니까? 농지령이라는 것이 생겨서 함부로 소작권을 이동하지 못하게는 됐지만, 지금 같아서는 지주들이 얼마든지 역용(逆用)을 할 수가 있게 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