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신은 조선을 떠나기 전날까지 동혁을 기다렸다. 눈이 까맣게 기다리다 못해 반신료까지 붙여서 전보를 쳤다. 그래도 아무 회답이 없어서 '이거 무슨 일이 단단히 생겨나보다'하고, 짐은 먼저 철도편으로 부치고, 빈몸으로 한곡리를 향하여 떠났다. 동혁을 만나 보지 않고는 떠날 수가 없었고, 또는 두 사람의 장래에 관한 일도 충분히 상의해서 이번에는 아주 아퀴를 짓고 떠나려 함이었다.


영신은 허위단심으로 두 번째 제3의 고향을 찾아왔으나 동혁의 형제와 건배는 물론 의형제를 맺었던 건배의 아내까지도 없었다. 집에만 없는 것이 아니라, 온 동네가 텅 빈 듯 그네들의 그림자조차 찾을 수 없었다.


동혁의 어머니는,


“아이구 이게 누구요?”


하고 영신의 손을 잡고 과부가 된 며느리를 맞아들이듯 하는데, 말보다 눈물이 앞을 선다.


“아아니, 다들 어디 갔습니까?”


영신은 부지중 노인의 소매를 끌어당겼다.


“그 앤 읍내로 잡혀갔다우!”


“잡혀가다뇨?”


영신은 목소리뿐 아니라 몸까지 오들오들 떨렸다.


“그 심술패기 동화란 녀석이, 회관집에 불을 지르다가 형한테 들켜서 그날 밤으로 어디론지 도망을 갔는데…”

“아, 그래서요?”

“그 다음날 경찰서에서 어떻게 알았는지, 동화를 잡으려고 순사 형사가 쏟아져 나왔구려.”

“그럼, 큰 자제는요?”

“큰앤 상관도 없는 일인데, 아우형제가 뭐 공모를 했다나, 그러고 조련질을 하다 못해서 '동화가 도망간 델 넌 알 테니, 바른 대로 대라'고 딱딱거리니까, '모르는 건 모른다지, 거짓말은 할 수 없다'고 막 뻗대던 끝에…”

어머니의 눈에서는 눈물이 쉴새없이 질금질금 흘러내린다. 그러면서,

“아뭏든 춘데 방으로나 들어갑시다.”

하고 영신을 끌어들이고는 한 말을 되하고 하면서,

 

“아이구, 인젠 자식이 둘다 한꺼번에 없어졌구료. 영감마저 동혁이 밥이나 사들여 보낸다고 읍내로 쫓아가셔서…”

하고는 싸늘한 자리 위에 가 엎어진다. 그동안 혼자서 곡기도 끊고 며칠 밤을 울며 밝힌 모양이다.

영신은 아랫입술을 꼭 깨문 채, 가엾은 노인을 위로해 줄 말 한마디도 나오지 않았다. 남을 위로해 줄 마음의 여유가 없다느니보다도, 제가 먼저 방바닥이라도 땅땅 치며 실컷 울고나 싶은 것을 억지로 참느라고 꽁꽁 안간힘을 썼다.

실망과 낙담을 한 끝에, 영신이도 웃목에 가 쓰러졌다, 황혼은 자취없이 토담집 속까지 스며드는데, 주인을 잃은 돼지가 우릿간에서 꿀꿀거리는 소리만 들린다.

얼마 있자 읍내로 동혁의 소식을 알려고 갔던 정득이와 갑산이가 찾아와서, 영신은 그들에게서 그 동안의 자세한 경과를 듣고 궁금증만은 풀 수가 있었다.

그들의 말을 모아 보면, 윷을 놀고 오다가 동화가 회관에 불을 놓는 것을 목도한 석돌이는 동혁의 단단한 부탁도 듣지 않고, 전화통의 본색을 발휘하느라고 그 길로 기천을 찾아가서 제 눈으로 본 것을 저저히 고해 바쳤다. 기천은 귀가 반짝 띄어서,

“옳다꾸나. 인제도 이놈!”

하고 이튿날 훤하게 동이 틀 무렵에 편지를 써서 머슴에게 자전거를 내주어, 읍내에 급보를 하였다.

저녁때에 중대사건이나 난 듯이 자동차를 몰아 온 경관대는, 추녀가 불에 그슬린 회관을 임검한 뒤에 동혁과 농우회원들의 집을 엄밀히 뒤졌다. 동시에 눈에 핏줄을 세워가지고 방화범을 찾다가,

“네가 어디다가 숨겨뒀거나 도망을 시킨 게 아니냐?”

고 종주먹을 대어도, 동혁은,

“백판 모르는 일을 안다고 할 수는 없소.”

하고 끝끝내 강경히 버티다가 기어이 검거를 당해서, 증인인 석돌이와 함께 읍내로 끌려갔는데, 다른 회원들도 날마다 하나 둘씩 호출을 당한다는 것이었다. 영신은 저도 함께 겪은 것처럼 모든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가뜩이나 파리한 몸의 피가 졸아붙는 듯한 고민의 하룻밤은 밝았다. 아침 뒤에 영신은 동혁의 어머니를 위로해 주고 읍내를 향하여 떠났다.

하늘은 짙은 잿빛으로 잔뜩 찌푸리고 비와 눈을 섞은 바람은 신작로 위를 씽씽 불어 숨이 탁탁 막힌다. 퇴원한 뒤로 조섭도 변변히 하지 못한 사람이, 사십 리 길을 내쳐 걷기는 참으로 어려운 노릇이었다. 그러나 영신은, 한시바삐 동혁을 만나 보고 싶은 생각에 마음이 죄어서 그런지, 의외로 걸음이 빨리 걸렸다. 그러나 돌부리에 무심코 발끝이 채여도 아랫배가 울리고 수술한 자리가 땅겨서 한참씩 움켜쥐고 섰다가, 다시 걷기를 몇 번이나 하였다.

경찰서에서는 동혁의 면회를 시켜주지 않았다. 졸라서 들을 일도 아니지만, 사법계에서는 고등계로 밀고 고등계에서는 사법계에서 관계한 사건이니까 우리는 모른다고 딱 잡아떼어서 가슴속에 첩첩이 쌓인 만단설화를 어디다가 호소해야 할지 차디찬 마룻바닥에 몸부림이라도 치고 싶었다.

영신은 하도 망단해서 이 방 저 방으로 풀이 죽은 걸음걸이로 드나들다가 '인제는 억지를 쓰는 수밖에 도리가 없다'하고 마음을 단단히 먹은 후, 다시 고등계실로 쑥 들어갔다. 겉으로는 방화사건이나 동혁은 고등계에서 취조를 받는 듯한 낌새를 형사들의 눈치를 보아서 짐작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영신은 주임의 책상 앞에 가 버티고 앉아서,

“난 그 박동혁이란 사람하고 약혼을 한 사람인데요, 이번에 멀리 떠나가게 돼서 단 몇 분 동안이라도 꼭 만나야겠어요.”

하고는 사뭇 떼를 썼다. 이마와 양미간이 좁다랗고, 몹시 신경질로 생긴 경부보는 안경 너머로 영신을 노려보며,

“한 번 안된다면 고만이지, 무슨 여러 말야! 여기가 어딘 줄 아는가?”

하고 소리를 버럭 지르며 부하를 시켜 당장 내쫓을 듯한 형세를 보인다. 그래도 영신은,

“여보슈, 당신도 인정이 있거던 남의 일이라도 좀 동정을 해주구료.”

 

하고는 듣든 말든, 그 동안에 제가 다 죽게 된 것을 그 사람이 살려 주었다는 것과 두 사람의 장래의 가장 중요한 일을 의논하지 않고서는 떠날 수가 없다는 사정을 좍 쏟아 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