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땡그렁 - 땡그렁 - '
청석학원 앞에 새로 단 종소리가 어렴폿이 들린다. 종대에 돌연히 나타나 종을 치는 사람을 보니 용수를 써서 얼굴은 보이지 않으나 시꺼먼 두루마기 앞섶에 번호를 붙였는데, 그 건장한 체격이 동혁임에 틀림없다. 동혁은 커다란 수갑을 찬 두 손을 모아 줄을 쥐고 매달리며 힘껏힘껏 잡아당긴다.
'땡그렁 - 땡그렁 - 땡그렁 - '
종이 사뭇 깨지는 듯한 소리가 온 동리에 퍼진다. 불 종소리나 들은 듯, 동네 사람들은 운동장에 백절치듯 모였다. 동혁은 무어라고 소리소리 지르며, 수갑을 낀 팔을 내두르면서 한바탕 연설을 한다.
그 말은 한 마디도 알아들을 수가 없으나, 군중은 우아! 우아! 하고 고함을 지른다. 그러다가 동혁은 무참히도 말로는 형용할 수 없는 모양으로 말을 탄 사람들에게 붙들려 질질 끌려간다.
“동혁씨!”
“동혁씨!”
영신은 외마디 소리를 지르며 허겁지겁 그 뒤를 쫓아가는데,
“사이상, 사이상, 네고도 잇데루노? 아 고와이.”
'영신씨, 영신씨, 잠꼬대를 하오? 아이 무서!' 하고 어깨를 흔드는 것은 새벽 기도회에 참례하려고 잠이 깬 곁에 누웠던 동급생이었다.
영신은 전신에 소름이 오싹 끼쳤다. 이마의 식은땀을 손등으로 씻으면서도, 꿈의 세계를 헤매는 듯 눈을 멀거니 뜨고 한참동안이나 천장을 쳐다보았다. 몸서리가 처지는 지겨운 환영에서는 깨어났으나 종소리만은 현실이었다. 학교 안에 예배당으로 쓰는 강당 앞에서 늙은 교지기가 쉬엄쉬엄 치는 종소리가 졸린 듯이 들린다. 꿈자리 산란한 이역의 서리 찬 새벽 하늘에…
영신은 기도회에 참례를 하려고, 밤 사이에 더 부어오른 다리를 간신히 짚고 일어서 세숫간으로 나가다가 머리 속이 핑 내돌리고, 다리의 힘이 풀려 문지방에 허리를 걸치고 쓰러졌다. 학생들은 벌써 기도회로 다 가고 굴속같이 컴컴한 기다란 복도에는 사람의 그림자도 없다.
영신은 의식을 회복하고 눈을 떴을 때에야 제 몸이 의료실로 떠매어 와서 누운 것을 깨달았다.
숙직하는 교원에게 응급치료를 받은 후 교의가 올 때까지 기다리는 동안에 영신은 몽유병 환자(夢遊病患者)와 같이 눈을 멀거니 뜨고 누워서, 수술실처럼 흰 휘장을 친 유리창이 아침 햇살에 뿌옇게 물이 드는 것을 넋을 잃고 보고 있었다. 그제야 맹장염 수술한 자리가 뜨끔거리는 것을 깨닫고,
“아이고! 인전…”
하고 절망적인 한숨을 내뿜었다.
백발이 성성한 교의는 실내에까지 단장을 짚고 들어와서, 영신을 자세히 진찰해 본 뒤에,
“몸 전체가 대단히 쇠약한데, 각기병은 짧은 시일에 쉽사리 치료를 할 수 없는 병이니, 고향으로 돌아가서 편안히 쉬며 치료를 하는 것이 좋겠소. 복부의 수술도 완전히 하지 못해서, 재발될 징조가 보이니 특별히 주의를 하지 않으면 큰일나오.”
하고는 비타민 B가 부족해서 나는 병이니, 현미(玄米)나 보리밥을 먹으라는 둥, 심장이 약하니 절대로 과격한 운동을 하지 말라는 둥 주의를 시키고 나갔다.
경험 있는 의사의 권고까지 받고, 영신은 더 있을 수가 없었다. 고명한 의사가 들이쌓였고, 의료기관이 아무리 발달된 곳인들 고향으로 돌아갈 노자 몇십 원이 없는 영신에게 있어 무슨 소용이 있으랴.
가나오나 남의 신세만 지는 몸이, 더구나 인정 풍속이 다른 수천 리 타향에서, 그네들의 진심에서 우러나오지 않는 친절을 받느니 보다는 하루바삐 정든 고향으로 돌아가서 피골이 상접해 가는 몸을 편안히 눕히지는 못하더라도 여러 해 만에 어머니를 곁에 모셔 오고, 청석골의 산천을 대하고, 꿈에도 못 잊는 어린 학생들의 손을 잡고 뺨을 비벼 보면, 정신상으로나마 얼마나 큰 위로를 받을지 몰랐다. 그는 마침내,
'가자, 죽더라도 내 고향에 가 묻히자!'
하고 비장한 결심을 하였다.
서울 연합회의 백씨에게 급한 사정을 하고 노비를 보내 달라고 편지를 써서 항공 우편으로 부쳤다. 돈 말을 하기는 죽기보다 싫지만 남에게 구구한 사정을 하는 것도 이번이 마지막인 것 같은 생각이 들어서, 한 달 학비를 다가 쓰는 셈만 친 것이다.
노비가 오기를 기다리는 동안 영신의 고민은 거의 절정에 이르렀다.
'우리의 결혼 문제는 어떡할까?'
그것은 물론 시급히 닥쳐오는 문제는 아니었다. 그러나 사랑하는 사람은 자유를 잃은 몸이 되어 있고, 저는 무엇보다도 첫째 조건인 건강을 잃은 몸이다. 그러나 이미 약혼을 해 놓고 이제까지 기다리던 터이니, 그 문제가 가장 큰 고민거리가 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이는 불원간 나올 자신이 있다고 하지만, 내 몸이 이 지경이 된 것을 보면 얼마나 낙심을 할까.
그이는 오직 나 하나를 기다리고 청춘의 정열을 억눌러 오지 않았는가. 나이 삼십에 가까운 그토록 건강한 청년으로 보통 남자로는 참을 수 없는 것을 점잖이 참아 오지 않았는가. 다른 남자는 술을 마시고 청루에까지 발을 들여놓는데, 그이는 생물의 본능을 부자연하게 억제하며 오직 일을 하는 것으로 모든 오뇌를 잊으려고 하지 않았는가. 더군다나 늙은 부모를 모신 맏아들로 오직 나 때문에, 이 변변치 않고 보잘 것 없는 나 하나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