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리 지루하던 겨울도 한번 지나만 가면 봄은 기다리지 않아도 저절로 닥쳐온다.
반가운 손님은 신 끄는 소리를 내지 않듯이, 자취없이 걸어오기로서니, 얼어붙었던 개천바닥을 뚫고, 졸졸졸 흐르는 물소리를 듣고, 말랐던 나뭇가지에서 새움이 뾰족뾰족 솟아나는 것을 볼 때, 뉘라서 새봄이 오지 않았다 하랴.
동혁은 신작로 가에서 잔디 속잎이 파릇파릇해진 것을 비로소 보았다. 미류나무 껍질을 손톱끝으로 젖혀보니, 벌써 물이 올라서, 나무하는 아이들의 피리소리도 멀지 않아 들릴 듯,
“이젠 완연히 봄이로구나!”
한 마디가 저도 모르는 사이에 새어 나왔다.
그는 논둑으로 건너서며 발을 탁탁 굴러 보았다. 흠씬 풀린 땅바닥은 우단 방석을 딛는 것처럼 물씬물씬하다.
동혁은 가슴을 붕긋이 내밀며, 숨을 깊다랗게 들이마셨다. 마음의 들창이 활짝 열리며, 그리고 훈훈한 바람이 쏟아져 들어오는 듯, 그는 다시 속 깊이 서리어 있는 묵은 시름과 함께,
“후-”
하고 마셨던 바람을 기다랗게 내뿜었다. 화로에 꺼졌던 숯불이 발갛게 피어난 방속같이 온몸이 후끈해지는 것을 느꼈다.
동혁이가 동리 어구로 들어서자, 맨 먼저 눈에 띄는 것은 불그스름하게 물들은 저녁 하늘을 배경 삼고, 언덕 위에 우뚝우뚝 서 있는 전나무와 소나무와 향나무들이었다. 회관이 낙성되던 날, 그 기쁨을 영원히 기념하기 위해서 회원들과 함께 파다 심은 상록수들이 키돋움을 하며 동혁을 반기는 듯,
“오오, 너희들은 기나긴 겨울에 그 눈바람을 맞고도 싱싱하구나! 저렇게 시푸르구나!”
동혁의 걸음은 차츰차츰 빨라졌다. 숨가쁘게 잿배기를 넘으려니까, 회관 근처에서 애향가를 떼를 지어 부르는 소리가 바람결을 타고 웅장하게 들려오는 듯하여서 그는 부지중에 두 팔을 내저었다. 그리고는 동혁은 초가집들을 내려다보며, 오랫동안 떠나 있던 주인이 저의 집 대문으로 들어서는 것처럼,
“에헴 에헴!”
하고 골짜기가 울리도록 기침을 하였다.
그의 눈에는 회관 앞마당에 전보다 몇곱절이나 빽빽하게 모여선 회원들이 팔다리를 벌렸다 오무렸다 하며 체조를 하는 광경이 보였다.
그는 고개를 돌리고 눈을 꿈벅하고 감았다가 떴다. 이번에는 훤하게 터진 벌판에 물이 가득히 잡혔는데, 회원이 오리 떼처럼 논바닥에 가 하얗게 깔려서, 일제히 이앙가(移秧歌)를 부르며 모를 심는 장면이 망원경을 대고 보는 듯이 지척에서 보였다. 동혁은 졸지에 안계(眼界)가 시원해졌다.
고향의 산천이 새삼스러이 아름다와 보여서 높은 멧부리에서부터 골짜기까지, 산허리를 한바탕 떼굴떼굴 굴러 보고 싶었다.
앞으로 가지가지 새로이 활동할 생각을 하며 걷자니, 그는 제풀에 어깻바람이 났다. 회관 근처까지 다가온 동혁은 누가 등뒤에서,
'엇 둘! 엇 둘!'
하고 구령을 불러주는 것처럼 다리를 쭉쭉 내뻗었다.
상록수 그늘을 향하여 뚜벅뚜벅 걸었다.
'乙亥年 6월 26일 唐津 筆耕舍에서'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