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봄 산기슭으로 스며드는 저녁 바람은 소름이 끼칠 만큼 쌀쌀하다. 그러나 그는 추운 줄을 몰랐다. 머리 위에서 새파란 광채를 흘리며 반짝거리는 외따른 별 하나를 우러러보고 섰으니까, 극도의 슬픔과 원한에 사무쳤던 동혁의 머리는 차츰차츰 식어가는 것 같다. 마음이 가라앉는 대로, 사람의 생명의 하염없음과 인생의 무상함을 새삼스러이 느꼈다.

'그만 죽을걸, 그다지도 애를 썼구나!'

하니, 세상만사가 다 허무하고 무덤 앞에 앉은 저 자신도 판결을 받은 죄수처럼, 언제 어느 때 죽음의 사자에게 덜미를 잡혀갈는지? 제 입으로 숨쉬는 소리를 제 귀로 들으면서도, 도무지 살아 있는 것 같지가 않다.

'수수께끼다! 왜 무엇 하러 뒤를 이어 나고, 뒤를 이어 죽고 하는지 모르는 인생 - 요컨대 영원히 풀어 볼 수 없는 수수께끼에 지나지 못한다'

'내가 이 채 영신이란 여자와 인연을 맺었던 것도, 결국은 한바탕 꾸어 버린 악몽이다. 이제 와서 남은 것은 깨어진 꿈의 한 조각이 아니고 무엇이냐'

될 수 있는 대로 인생을 명랑하게 보려고 노력하여 오던 동혁이언만 너무나 뜻밖에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눈앞에 보고는 회의와 일종 염세의 회색 구름에 온몸이 에워싸이는 것이다.

'별은 왜 저렇게 무엇이 반가와서 반짝거리느냐. 뻐꾹새는 무엇이 설워서 밤 깊도록 저다지 청승맞게 우느냐. 영신은 왜 무엇하러 나왔다 죽었고, 나는 왜 무엇하러 이 무덤 앞에 올빼미처럼 두 눈을 껌벅거리고 쭈그리고 앉았느냐.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그 까닭을 알 수 없다.

순환소수(循環小數)와 같이 쪼개보지 못하는 채, 사사오입(四捨五入)을 하는 것이 인생 문제일까? 쳇바퀴를 돌리는 다람쥐 모양으로, 까닭도 모르고 또한 아무 필요도 없이, 제자리에서 맴을 돌며 허위적거리는 것이 인생의 길일까?

오직 먹기를 위해서, 씨를 퍼뜨리기 위해서, 땀을 흘리고 피를 흘리고 서로 쥐어뜯고 싸우고 잡아먹지를 못해서 앙앙거리고 발버둥질을 치다가, 끝판에는 한 삼태기의 흙을 뒤집어쓰는 것이 인생의 본연한 자태일까?'

동혁의 머리 속은 천 갈래로 찢기고 만 갈래로 얽혀져 갈피를 잡을 수가 없다.

그는 가슴이 무엇에 짓눌리는 것처럼 답답해서 벌떡 일어났다. 팔짱을 끼고 제절(除節) 앞을 왔다 갔다 하다가, 봉분의 주위를 돌았다. 열 바퀴를 돌고 스무 바퀴를 돌았다. 그러다가 무덤을 베개삼고 쓰러지며, 하늘을 쳐다본다. 별은 그 수가 부쩍 늘었다. 북두칠성은 금강석을 바수어서 끼얹은 듯이 찬란히 빛나고 있다. 그 중에도 큰 별 몇 개는 땅 위의 인간들을 비웃듯이 눈웃음을 치는 것 같다. 동혁은 그 별을 향해서 침이라도 탁 뱉고 싶었다.

그러다가 그는 생각을 홱 뒤집었다.

'그렇다. 인생 문제는 그 자체인 인생의 머리로 해결을 짓지 못한다. 인류의 역사가 있은 후, 수많은 철학자와 사상가와 예술가가 머리를 썩이다가 해결의 실마리를 잡아 보지 못한 문제다. 그것을 손쉽게 풀어 보려고 덤비는 것부터 망령된 짓이다' 하고는 단념을 해버린 뒤에,

'그렇지만 채영신이가 죽은 것과 같이, 박동혁이가 살아 있는 것도 사실이다. 정신병자가 아닌 다음에야 누구나 부인할 수 없는 엄연한 현실이다. 그러니 우리가 생명이 있는 동안은 값이 있게 살아 보자! 산 보람이 있게 살아 보자! 구차하게 살려는 것도 어리석은 일이지만 타고난 목숨을 제 손으로 끊어 버리는 것도 또한 어리석은 일이다' 하고, 영신이가 반은 자살한 것처럼 생각도 하여 보았다.

'일을 하자! 이 영신이와 같이 죽는 날까지 일을 하자! 인생의 고독과 고민을 잊어버리기 위해서라도, 일을 해야만 한다. 사랑하던 사람의 사업을 뒤를 이을 사람은 나밖에 없다. 울어 주고 설워해 주는 것보다 내가 청석골로 와서 자기가 끼친 사업을 계속해 준다면, 그의 혼백이라도 오죽이나 기뻐할까. 든든히 여길까. 일에 바쁜 꿀벌은 슬퍼할 겨를도 없다는 격언이 있지 않은가' 하고 몇 번이나 생각을 뒤집었다.

'그럼, 우리 한곡리는 어떡하나? 흐트러진 진영을 수습할 사람도 없는데…'

동혁은 다시금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동혁은 앞으로 해 나갈 일을 궁리하기보다도 우선 저의 신변이 몹시 외로운 것을 느꼈다. 애인의 무덤을 홀로 앉아 지키는 밤. 그 밤도 깊어가서 저의 숨소리조차 듣기에 무서울 만큼이나 온 누리는 괴괴한데 추위와 함께 등어리에 오싹오싹 소름이 끼치게 하는 것은 형용할 수 없는 고독감이다.

처음부터 서로 믿고 손이 맞아서, 일을 하여 오던 동지에게 배반을 당하고, 부모의 골육을 나눈 단지 한 사람인 친동생은 만리타국으로 탈주한 후 생사를 알 길 없는데, 목숨이 끊치는 날까지 저의 반려를 삼아 한 쌍의 수리(鷲)와 같이 이 세상과 용감히 싸워 나가려던 사랑하던 사람조차 죽음으로써 영원히 이별한 동혁은 외로왔다. 무변대해에서 키를 잃은 쪽배와도 같고, 수백 길이나 되는 절벽 아래서 격랑에 부딪치는 불꺼진 등대만큼이나 외로왔다. 무한히 외로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