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부형들은 사십 리, 오십 리 밖까지 가서 고명하시다는 한의(漢醫)를 데리고 왔다. 칠십도 넘어 보이는 노인을 가마에 태워 가지고 온 성의에 감동이 되어서 영신은, '저 늙은이가 뭘 알꼬' 하면서도 맥을 짚어 보라고 팔을 내밀었다.

그들이 집중하는 것은 다 각각이나, 화타(華陀) 편작(扁鵲)이가 와도 오늘밤을 넘기지 못하리라는 데는 의견이 일치하였다. 그래도 학부형들은 화제(和劑)를 내어달라고 부득부득 졸라서, 또다시 장거리로 약을 지으러 가는 것이었다.

오늘은 초저녁부터 영신의 숨소리가 더 거칠어졌다. 목구멍에서 가래가 끓는 소리까지 그르렁그르렁한다. 아랫도리는 여전히 감각을 잃고 있기 때문에 고통을 몰라도, 가슴이 답답해서 몹시 괴로와한다. 병마가 사방으로부터 심장을 향하고 몰려들기를 시작한 모양이다.

그러나 이상스럽게도 영신의 정신만은 그 말과 함께 똑똑하다.

“자꾸 울지들 말아요. 나도 안 우는데…”

하고 간호하는 부인네들을 둘러보기도 하고,

“너희들은 어서 가 공부해. 응 어서!”

하고 상학 시간이 되면 저의 주위로 모여드는 아이들을 학원으로 올라가라고 손짓을 하였다. 그는 자기가 누운 동안 하루도 주야학을 쉬지 못하게 하였다.

창밖은 별빛조차 무색한 그믐밤이다. 앞뜰과 뒷동산의 앙상한 삭정이를 휩쓰는 바람소리만 파도 소리처럼 쏴아쏴아 하고 지나간다. 떨어지다 남은 바싹 마른 오동잎사귀가, 창밖 툇마루에 버스럭 하고 떨어지는 소리에 영신은 고이 감았던 눈을 떴다. 사람의 발자국 소리로 들렸는지,

“문 열어요. 동혁씨 왔나 봐…”

하고 잠꼬대하듯 헛소리를 하며 뒤꼍으로 통한 문으로 고개를 돌린다. 벌써 그 눈동자에는 안개가 뽀얗게 낀 것처럼 정기가 없다. 그렇게 아이 그저 안 오네!”

영신은 한숨과 함께 원재 어머니 편으로 머리를 돌렸다. 무슨 생각이 번개같이 나는 듯,

“저어기, 저것 좀…”

이번에는 머리맡에 놓인 책상 서랍을 입으로 가리킨다.

“어머니 사진요?”

원재 어머니 책상 앞으로 갔다.

“아아니, 그이 편지…”

동혁의 편지를 받아 든 영신은 감옥에서 나온 봉함 엽서의 획이 굵다란 먹 글씨를 희미한 불빛에 내려보고 치보고 한다.

동혁이와 처음 만났던 때부터 경찰서에서 면회를 하던 때까지의 추억의 가지가지가 환등처럼 흐릿하게나마 주마등과 같이 눈앞을 지나가는 모양이다. 그는 조심스러이 편지에 입을 맞추고 나서, 어눌하나마 목소리를 높여,

“동혁 씨, 난 먼첨 가요. 한곡리하고 합병도 못해 보고… 그렇지만 난 행복해요. 등뒤가 든든해요. 깨끗한 당신의 사랑만은 영원히 변하지를 않을 테니까요. 그러고 끝까지 꿋꿋하게 싸우며 나가실 걸 믿으니까요…”

하고 나서, 숨을 가쁘게 들이쉬고 나더니,

“동혁 씨, 조금도 슬퍼하진 마세요. 당신 같으신 남자는 어떤 경우에든지 남에게 눈물을 보여선 못 씁니다!”

하고는 몹시 흥분해서 헐떡이다가, 원재 어머니를 보고,

“그이가 오거던요, 지금 한 말이나 전해 주세요. 뭐랬는지 들었죠?”

하고 당부를 한다. 붓을 들 기력도 없는 그는, 말로나마 사랑하는 사람에게 몇 마디를 남긴 것이다.

그리고는 가늘게 떨리는 손으로 앙가슴을 헤치더니 그 편지를 속옷 속에 꼭 품고 저고리 앞섶을 여민다. 이제까지 그들은 사진 한 장 바꾸어 가진 것이 없었다.

새로 두 시 - 세 시 -

간병하던 사람은 여러 날 눈도 붙여 보지 못해서 꼬박꼬박 졸고 앉았고, 그다지 떨어지지 않으려던 금분이마저 기진맥진해서, 선생의 발치에 쓰러진 채 잠이 깊이 들었다.

태고의 삼림 속과 같이 적막한 방안에 홀로 깨어 있는 것은 영신의 영혼뿐. 지새려는 봄밤 한곡리 앞 바다에 뜬 새우잡이 배의 등불처럼 의식이 깜박깜박하면서도, 악박골 약물터 우거진 숲 속의 반딧불과 같이 반짝하다가 꺼지려는 저의 일생을 혼몽 중에 추억의 날개로 더듬어 보는 듯,

“꼬끼오 - ”
건너 마을에서 졸린 듯한 닭 우는 소리가 들렸다. 뒤를 이어 안 마당에서도 홰를 치며 우는 소리가 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