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동혁에게 대해서 미안한 마음을 금할 수 없다.
'내가 두 번 다시 돌아오지 못하는 남의 청춘을 무참히 짓밟는 것이 아닐까. ○○일보사 누상에서 첫번 얼굴을 대한 후, 벌써 몇 해를 사모해 오고 사랑해 오는 동안, 나는 그이에게 털끝만한 기쁨도 주지 못하였다. 도리어 적지 않은 정신상 육체상 고통을 주었을 뿐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이제 와서, 무슨 매매 계약을 한 것처럼 약혼을 해약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생각이 여기까지 이르자, 영신의 여윈 뺨을 소리 없이 흘러내리는 것은, 아직도 식지 않은 눈물이다. 좀처럼 모든 일에 비관하지 않으려던 전일에 비해서, 너무나 마음까지 몹시 약해진 것을 스스로 깨달을수록, 눈물은 그 비례로 쏟아져 소매를 적시고 베개를 적신다.
사랑하는 사람은 돌덩이 같은 육체와 무쇠 같은 의지력을 가진 사람이니까, 감옥에서 고생쯤 하는 것으로는 끄떡도 안할 것만은 믿는다. 그저 무사히 나오기만 축수할 뿐이다.
'그렇지만 그이가 나온 뒤까지 오래오래 두고 이 지경대로 있으면 어떡하나? 하나님께서 설마 나를 이대로 버리실 리는 만무하지만…' 하고 아직도 신앙을 잃지 않으려고, 정성껏 기도도 올려 본다. 주를 부르며 저의 고민을 하소연도 해본다.
'내가 만일 건강이 회복되어서, 그이와 결혼생활을 한다면 어떻게 될까. 구차한 살림에 얽매고 어린것들이 매어달리고, 시부모의 시중을 들고, 집안 식구의 옷뒤를 거두고, 다만 먹기를 위해서 이른 아침부터 밤늦도록 다른 농촌의 여자와 같이 집구석 부엌구석에서 한평생을 헤어나지 못하고 말 것이다'
하고 앞일을 상상해 볼 때, 영신의 머리 속은 또다시 시꺼먼 구름이 끼는 것처럼 우울해진다. 아직까지 사업에 무한한 애착심을 가지고, 한 몸을 이 사회에 바쳐 온 영신으로서는, 두 가지 길 중에 어느 한가지 길을 밟아야 옳을는지, 방황하지 않을 수 없다.
'어떡하나? 아아, 어떻게 하면 좋을까?'
영신은 이불 속에서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쥐어뜯었다.
'내가 그이를 진심으로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지금의 나로서는 꼭 한 가지밖에 취할 길이 없다!'
영신은 무한히 고민한 끝에 한 가지 결론을 얻었다.
'나와의 결혼을 단념시킬 것뿐이다!'
이 말 한 마디는 창자를 끊어내는 듯한 마지막 가는 말이다. 그러나 영신은 그렇게 부르짖지 않을 수 없었다.
'그이는 웃음의 말이라도 (조선 안의 하고많은 여자 중에 하필 채영신 석 자만 쳐다보고, 두 눈을 꿈벅거리고 있는 나 자신이 불쌍해 보인다)고 하였다. 그 말이 어느 정도까지는 속임 없는 고백일 것이다. 기막히는 일을 당할 때에 웃음이 터져나오고 가슴이 답답할 때에 트림이 끓어오르는 것과 같이, 그는 하도 기다리기가 지루해서 그런 말을 하게까지 된 것이 아닐까?'
하니, 두 사람을 만나게 한 운명을 저주하고도 싶었다.
'왜 곧잘 참아 오던 내가, 내 발로 걸어서 한곡리를 찾았고, 달 밝은 그날 밤 바닷가에서 경솔히 마음을 허락했던가. 일평생의 고락을 같이 할 맹세까지 했던가?'
하고 그때의 기분이 너무나 로맨틱(浪漫的)하였던 것을 몇 번이나 후회하였다.
'아아, 그러나 나는 그이를 지극히 사랑한다. 그이를 사랑하게 된 뒤로부터 나는 하나님께 대한 신앙심까지 엷어졌다. 지금의 박동혁은 나의 생명이다! 내 맘이 그이를 떠나서는 살 수 없다. 그러나 나는 무슨 일이 있든지 이 세상에 다만 한 사람인 그이의 행복을 위해서 참는 도리밖에 없다. 자아를 희생할 줄 모르는 곳에, 진정한 사랑이 없다. 사업을 위해서 이미 희생이 된 이 몸을 사랑하는 사람의 장래를 위해서, 두 번째 희생으로 바치자! 이것이 참되고 거룩한 사랑의 길이다!'
하고 영신은 두 번 세 번 제 마음을 다질렀다.
'이번에 만나는 때에는 단연히 약혼을 해소하자고 제의를 하리라. 의논을 할 것이 아니라, 이편에서 딱 무질러 버리고 말리라'하고 단단히 결심을 하였다.
그러나 저의 건강으로 말미암아, 이런 결심까지 하게 된 것이 슬펐다. 그다지 사랑하던 남자를 놓칠 생각을 하니 분하기도 하였다. 동혁의 넓은 품안에, 그 아귀힘 센 팔에, 채영신이가 아닌 다른 여자가 안길 것을 상상만 해 보아도, 이제까지 느끼지 못하던 질투의 불길이 치밀어 얼굴이 화끈하고 다는 것이야 어찌하랴.
'시기를 하거나 질투를 하는 것은 가장 야비하고 천박한 감정이다' 하고 제 마음을 꾸짖어도 본다. 그러나 꾸지람을 듣는 것쯤으로 그 분이 꺼질까 싶지가 않다.
기숙사의 밤이 깊어가는 대로 영신의 고민도 더욱 깊어가고, 마음이 괴로울수록 안절부절을 못하는 육신도 어느 한 군데 괴롭지 않은 데가 없었다.
…영신이가 떠나는 날 아침, 넓다란 학교 마당에 전송하여 주는 사람은 사감과 한 방에 있던 학생 두엇뿐이었다. 몇 달 동안을 숙식을 같이 하던 여자는, 매우 섭섭한 표정을 지으면서 현관까지 따라나와,
“사요나라, 오다니이.”
'잘 가요, 몸조심하셔요'하고 굽실해 보이고는 게다짝을 달각거리며 뒤도 안 돌아보고 들어가 버린다. 제 방에서 환자를 내보내는 것이 시원섭섭한 눈치다.
오래간만에 조선옷으로 갈아입고, 고리짝 하나를 인력거 앞에다 놓고 정거장으로 나오는 영신의 행색은 초라하였다. 그는 인력거 위에서 흔들리며, '내가 지금 어디로 가는 셈인가!' 하고 번화한 시가지를 둘러보았다. 돈 있는 집 딸들이 음악학교 같은 것을 졸업하고 그야말로 금의(錦衣)로 환향(還鄕)하는 광경을 상상해 보고는, '내가 얻어 가지고 가는 것은 병뿐이로구나!'하고 어이없는 웃음을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