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뒤로 회원들은 물론 동네의 인심은 동혁에게로 쏠렸다. 젊은 사람들의 일에 쫓아다니며 훼방까지는 놀지 않아도,
“저 녀석들은 처먹고 헐 짓들이 없어서 밤낮 몰려만 댕기는게여.”
하고 마땅치 않게 여기던 노인네까지도,
“미상불 이번에 동혁이가 어려운 일 했느니.”
“아아무렴, 여부지사가 있나. 우리네 수로야 어림도 없지. 언감생심 변리를 한 푼도 아니 물다니.”
하고 동혁의 칭송이 놀라왔다. 너무나 고마와서 동혁을 찾아와서 울면서 치사를 하는 부형도 있는데, 그 통에 박 첨지는 아들 대신으로 연거푸 사나흘 동안이나 끌려다니며 막걸리를 얻어먹고 배탈이 다 났다. 동혁은,
'자아, 빚들은 다 갚았으니까, 앓던 이 빠진 것버덤 더 시원하지만 이젠 어떻게 전답을 떨어지지 않고 지어 먹을 도리를 차려야 셈들을 펴고 살아 보지'
하고 제 이단책(第二段策)을 생각하기에 골몰하였다. 그러다가,
'급하다고 우물을 들고 마시나? 천천히 황소걸음으로 하지'
하고, 저 자신과 의논을 해 가면서 회원들의 생활이 짧은 시일에 윤택해지지는 못하나마, 다시 빚은 얻지 않을 만큼 생계를 독립할 수 있는 정도까지는 끌어올리고 말리라 하였다. 농지령(農地令)이라는 것이 발포되었대야 결국은 지주들의 마음대로 할 수가 있게 된 것이니까, 어떻게 강도사집뿐 아니라 다른 지주들까지도 한 십개 년 동안만 도지로 논을 내놓게 만들었으면 힘껏 개량식으로 농사를 지어 그 수입으로 땅마지기씩이나 장만을 하게 될 텐데…
하고 꿍꿍이 셈을 치고 있는 중이다. 회원들의 돈은 빚을 깨끗이 청산하고도 육십여 원이나 남아서 그것을 밑천으로 새로이 소비조합(消費組合)을 만들 예산을 세웠다.
그러나 형의 속을 이해하지 못하는 동화는 다른 반대파의 회원들보다도 불평이 많았다. 워낙 저만 공부를 시켜 주지 않았다고 부형의 탓을 하는 터에, 제 말따나 형 때문에 장가도 들지 못해서 그런지 계모 손에 자라난 아이 모양으로 자격지심이 여간 대단하지가 않다.
이번 일만 해도,
“성님도 물렁 팥죽이지, 그깐 녀석을 요정을 내 버리지 못한단 말요? 겨우 변리 안 받은 게 감지덕지해서, 우리 회의 회장이란 명색을 준단 말요? 난 나 혼자래두 나와버릴 테유. 그 아니 꼰 꼴을 안보면 고만이지.”
하고 투덜댄다. 그러면 동혁은,
“네 형은 창피하거나 아니꼬운 줄을 몰라서 죽치구 있는 줄 아니? 호랑이 굴 속엘 들어가야 새끼를 얻는 법이란다.”
하고 섣불리 혈기를 부리지 말라고 타이르건만 그래도 아우는,
“흥 어느 때고 두고 보구려. 내 손으로 회관을 부숴버리구 말 테니…”
하고 입술을 깨물고 벼른다.
“글쎄 얘야, 지금 회관을 쓰고 못 쓰는 게 시급한 문제가 아니라니깐. 그러나 언제든지 우리 손으로 다시 들어오게 하고야 말걸, 왜 그렇게 성미가 급하냐?”
하면서도 어느 때 무슨 일을 저지를지 몰라서 형은 마음이 놓이지를 않았다.
조기회는 여전히 하나, 회관은 커다란 자물쇠를 채운 채 쓰지를 않고 그대로 내버려두었다. 쓰지를 않는 게 아니라, 그 동안 기천이가 여러 번 열라고 명령을 하였어도 동화와 갑산이가 열쇠를 감추고는 서로 미루고 내놓지를 않아서 쓰지를 못하고 있다.
“얘 동화야, 이제 그만 쇳대를 내놔라. 이렇게 켕기고 있다가는 필경 기천이가 남의 힘을 빌어서까지 강제로 열기가 쉬우니, 그때도 너희들이 안 내놓고 배길 테냐? 무슨 회든지 우리끼리 합심만 하면 또다시 만들어질걸.”
하고 순순히 타일러도 동화는,
“아, 어느 놈이 우리가 지은 회관을 강제로 열어요? 흥, 난 그럴 때만 기다리고 있겠우.”
하고 끝끝내 형하고도 타협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야학도 새 집에서 못하고, 전처럼 남의 머슴 사랑을 빌려 가지고 구석구석이 하게 되었다.
영신에게서는 하루 걸러 편지가 왔다. 침대 위에서 따로따로를 하다가, 송엽장(松葉杖)을 짚고 걸음발을 타게까지 되었는데, 이제는 밥을 먹고도 소화가 잘 된다는 것이며, 의사는 좀더 조섭하라고 하나, 비용 관계로 더 있을 수가 없어서, 불일간 퇴원을 하겠다는 반가운 소식이 뒤를 이어 왔었다.
공책에다가 일기를 쓰듯이 감상을 적은 것을 떼어 보내기도 하고, 이번에 당신이 아니었더라면 벌써 황천길을 밟았을 것을 살아났다는 만강의 감사와 떠나 보낸 뒤의 그립고 아쉬운 정을 애틋이 적어 보낸 것이었다. 이번 편지는 퇴원을 하느라고 부산한 중에 급히 쓴 연필 글씨로,
'청석골의 친절한 여러 교인과 학부형들에게 에워싸여서 지금 퇴원을 합니다. 그러나 천만 사람이 있어도 이 영신에게는 새로운 생명을 주신 은인이시고 영원한 사랑이신 우리 동혁 씨와 이 기쁨을 나누지 못하는 것이 무한히 섭섭합니다.
그러나 또 한 가지 기쁜 소식을 전해 드리는 것은 일전에 서울 연합회에서 백현경씨가 전위해서 내려왔었는데, 정양도 할 겸 횡빈(橫濱)에 있는 신학교로 가서, 몇 해 동안 수학을 하도록 주선을 해 주겠다는 약속을 하고 올라갔는데요, 여러 해 벼르고 벼르던 유학을 하게 된 것은 기쁘지만 또다시 당신과 더 멀리 떨어져 있을 생각을 하니 무한히 섭섭해요. 지금부터 눈물이 납니다. 어수선스러워서 고만 쓰겠어요. 답장은 청석골로 -
**월 **일 당신의 영신'
동혁은 즉시 답장을 썼다. 편지가 올 때마다 간단히 회답은 하였지만 수술한 경과가 좋아서 안심도 되었고 동네 일로 정신이 쓰라려서, 긴 편지는 쓰지 못하고 있었다. 영신을 병원으로 데리고 가서 간호를 해 주고 있던 동안에 무언중에 정이 더 깊어진 것을 깨달았고 피차의 성격이나 사랑하는 도수는 가장 어려운 일을 당해 보아야 비로소 알아지고, 그 깊이를 측량할 수가 있는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그러나 동혁은 - 영신이도 그렇지만 - 영신이가 연애하는 사람이라느니보다도, 이미 자녀까지 낳고 살아오는 아내와 같이 느껴졌다. 그만큼이나 믿음성스럽고 듬숙한 맛이 있어서 편지를 쓰는 데도 남들처럼 달콤한 문구를 쓸래야 써지지가 않았다.
'무사히 퇴원하신 것을 두 손을 들어 축하합니다. 즉시 뛰어가서 완쾌하신 얼굴을 대하고는 싶지만 지금 내가 떠나면 동네 일이 또 엉망으로 얽힐 것 같아서 험악한 형세가 가라앉기를 기다리는 중이니 섭섭히 아셔도 할 수 없는 일이외다. 유학을 가시게 된다고요?
내가 반대를 한대도 기어이 고집하고 떠나가실 줄은 알지만, 신학교로 가신다니 [지원한 것은 아니라도] 신앙이 학문이 아닌 것은 농학사나 농학박사라야만 농사를 잘 지을 줄 안다는 거와 마찬가지가 아닐지요. 하여간 건강 상태를 보아서 당분간 자리를 떠나서 정양할 기회를 얻는 것은 나도 찬성한 것이지만… 우리가 약속한 삼 개 년 계획은 벌써 내년이면 마지막 해가 됩니다. 그런데 또 앞으로 몇 해를 은행나무처럼 떨어져 있게 될 모양이니, 실로 앞길이 창창하고 아득하외다.
영신 씨! 우리의 청춘은 동아줄로 칭칭 얽어서 어디다가 붙들어 맨 줄 아십니까? 우리의 일이란 관 뚜껑을 덮을 때까지 끝나는 날이 없을 것이니 사업을 다 하고야 결혼을 하려면, 백 살 천 살을 살아도 노총각의 서글픈 신세를 면하지 못하겠군요. 조선 안의 그 숱한 색시들 중에 채영신 석 자만 쳐다보고, 눈을 꿈벅꿈벅하고 기다리는 나 자신이 못나기도 하고 어찌 생각하면 불쌍하기도 합니다.
그렇다고 결코 동정해 주기를 바라는 것은 아니나, 하루바삐 우리 둘이 생활을 같이 하고 힘을 한데 모아서, 서로 용기를 돋워가며 일을 하게 되기를 매우 조급히 기다리고 있소이다. 며칠 틈만 얻게 되면 또 한 삼백 리 마라톤을 하지요. 부디 부디 몸을 쓰게 되었다고 무리한 일은 하지 마십시오! 그것만이 부탁이외다.
당신의 영원한 보호 병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