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신의 목소리에는 정근의 머리가 저절로 수그러들 만한 열과 저력이 있었다. 두 사람은 함께 묵묵하였다. 그러다가 영신은 이제 더 할 말이 없다는 듯이,

“난 좀 자야겠어요.”

하고 일어서더니, 웃간으로 올라가 턱 누워버린다.

점심 때가 훨씬 겨워서 영신은 동혁이가 청석골로 와서 기다리는 꿈을 꾸다가 소스라쳐 깨었다. 눈을 비비며 아랫방으로 내려가 보니, 정근은 그림자도 찾을 수 없는데, 어머니 홀로 벽을 향해서 훌쩍훌쩍 울고 누웠다.

“어머니, 그이 어디 갔우?”

하고 딸은 어머니의 어깨를 흔들었다.

“뉘 아능야, 내게두 말없이 가방을 들구 나갔당이.”

어머니는 돌아누운 채 울음 반죽으로 대답을 한다. 영신은 그 곁에 한참이나 잠자코 앉았으려니, 저에게 너무나 매정스러이 퇴짜를 맞고, 다시 머나먼 길을 인사도 안하고 떠나간 정근이가 가엾은 생각이 들었다. '차차 그 이한테두 좋은 배필이 생기겠지'하고 눈을 내리 감고는 그의 장래를 마음속으로 축복해 주었다. 그러다가 어머니의 뼈만 남은 손을 잡으며,

“어머니!”

하고 불렀다.

“어째 그리능야?”

어머니는 그제야 반쯤 돌아눕는다.

“너무 그렇게 섭섭해하지 마슈. 그 사람보다 더 잘나고 튼튼한 사윗감을 보여 드릴께 응.”

하고 영신은 응석조로 늙은 어머니를 위로한다.

“사윗감이사 어디 없겡이. 그러나 정근이만큼 어려서부터 정이 들구 얌전스리 구는 사람이 그리 쉬운 줄 아능야.”

하더니,

“네 그럴 줄이사 몰랐지. 에미 마지막 소원두 끊어지구…”

하는 어머니의 눈은 또 질금질금해진다.

“글쎄 그렇게 언짢어하지 마시라니깐. 어느 새 무슨 소망이 끊겼다구 그러슈. 몇 해만 눈 꿈쩍하구 기다려 주시면 내가 잘 외시고 살 텐데…”

“듣기 싫다야. 내사 하도 여러 번 속았다. 이전 금 방석으로 태운대두 곧이 들리지 않는당이.”

하고 한숨만 들이쉬고 내쉬고 한다. 영신은 동혁이와 약혼을 하기까지의 자세한 경과와 청석학원을 짓느라고 죽을 힘을 다 들인 이야기를 좌악 하고 나서,


“나는 물론 어머니가 낳아서 길러 주신 어머니의 딸이지만 어머니 한 분의 딸 노릇만은 할 수 없다우. 알아 들으시겠우? 어머니 한 분한텐 불효하지만, 내딴엔 수천 수만이나 되는 장래의 어머니들을 위하여 일을 하려고 이 한 몸을 바쳤으니까요. 그러는 게 김 정근이 하나한테만 이 살덩이를 맡기는 것보다 얼마나 거룩하구 뜻 있는 일인지 몰라요. 네 그렇죠? 어머니!”


어머니는 일어나 앉으며 파뿌리 같은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쓰다듬어 올리더니,

“모르겠다. 내사 평생을 이렇게 혼자 살란 팔자지비…”

하고는 다시 말이 없다.

“어머니, 그럼 우리 청석골로 갑시다. 아무려면 어머니 한 분이야 굶겨 드리겠우?”

“싫당이 싫어!”

어머니는 그것도 생각해 보았다는 듯이, 체머리를 앓는 사람처럼 머리를 흔든다.

“밥술을 놓는 날까지는, 내 앙이 벌어먹으리. 네 입하나 감당을 하기두 어려운데 이까짓 쓸데없는 늙은이, 무쉴에 쫓아가겡이. 네 출가하는 날꺼지 살기나 하문, 그제나 구경을 가지비.”

그 말에 영신은 참았던 눈물이 핑 돌았다.

얼핏 저고리 고름으로 눈두덩을 누르고 온몸의 용기를 내어,

“아뭏든 내가 없인 낙성식을 못할테니깐 저녁 차로 떠나야겠우.”

하고 차마 하기 어려운 말을 꺼냈다.

“앙이, 오늘 나조루 떠나? 정말잉야? 어미허구 하룻 나조 자보지두 앙이하구…”

마르고 주름잡힌 어머니의 얼굴은 무한한 고독과 섭섭한 빛에 뒤덮인다. 딸은 그 얼굴을 마주 쳐다보다가,

“그럼 어떡허우? 어머니, 그럼 난 어떡허우?”

하고 목소리를 떨다가 어머니의 무릎에 이마를 들비비며 느껴느껴 울었다.

…어머니는 정거장까지 배웅을 나왔다.

호각 소리가 들리고 기차 바퀴가 구르기 시작하는데 치맛자락을 들추고 다 떨어진 주머니를 끄르며 따라오더니, 딸이 얼굴을 내민 차창으로 그 주머니를 들여뜨리고는 잠자코 돌아섰다.

그 주머니 속에는 생선 광주리를 이고 다니면서 푼푼이 모아 넣은 돈이 묵직하게 들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