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지만…”

“그렇지만 뭐야요?”

“난 오늘까지도 영신 씨 한 사람만을 사랑하고 있는데…”

이번에는 영신이가 대답에 궁한 듯 입을 뾰족이 다물고 있다가,

“나같은 여자를 그다지 꾸준하게 사랑해 주신다는 데는, 고맙다고 해야 할지 미안스럽다구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하고 여전히 눈을 내리깔고 있다가 목소리 보드럽게,

“정근씨!”

하고 손톱여물을 썰고있는 남자의 얼굴을 쳐다본다.

“그런데 두 사람 중의 한편의 짝사랑만으로 결혼이 성립될 수가 있을까요?”

그말에 신경질적인 정근의 눈초리가 샐쭉해졌다.

“그야 성립될 수야 없겠지요.”

하고 영신의 얼굴에 구멍이라도 뚫을 듯이 똑바로 노려 보더니,

“도대체 어째서 뭣 때문에 나를 사랑할 수 없다는 거야요? 그 까닭이나 똑똑히 말해 주세요.”

하고 바싹 다가앉는다.

단 둘이서만 이야기할 기회를 주려고 어머니는 자리를 피해서 영신과 정근은 피차에 최후의 담판을 개시하였다. 그러나 '무슨 까닭으로 나를 사랑하지 않느냐?'는 어리석은 듯하고 거북한 질문에는 얼른 대답이 나오지 않아서 영신은 잠시 주저할 수밖에 없었다.

“사람의 감정이란 인력으로 억지로 못하는 거야요. 하지만 난 인간적으론 정근씨를 싫어하지 않아요.”

“그럼요?”

정근은 약빨리 말끝을 채뜨린다.

“일이 기왕 이렇게 됐으니 솔직하게 말씀드리죠.”

하고 영신은 무슨 셈을 따지듯 엄지손을 꼽는다.

“첫째 돈을 모아서 저 한 사람의 생활 안정이나 꾀하려는 정근씨의 이기주의가 싫어요!”

“이기주의가 싫다구요? 우리에겐 경제 생활의 토대가 없으니까 따라서 문화도 없는 게지요. 그러니까 우린 첫째 돈을 모아가지고 모든 걸 사야만 해요. 결국은 모든 걸 돈이 지배하고 해결을 짓는 게니까요.”

“그건 퍽 영리하고도 아주 현실적인 사상인진 모르지만요, 제 목구멍이나 금전밖에 모르는 호인(胡人)이나 유태 사람은 되고 싶지 않아요 저라는 개인 이외에 사회두 있구 민족두 있으니까요.!”

“암만 사회를 위하느니 민족을 위하느니 하고 떠들어도 우선 돈을 안 가지곤 무슨 일이든지 손도 대볼 수 없는 게 엄연한 사실인데 어떡허나요?”

“물론 돈이 필요하지요. 그렇지만 우린 필요한 것과 귀한 걸 구별할 줄 알아야겠어요. 더군다나 계몽 운동이나 농촌 운동은 다른 사업과 달라서, 오직 정성으로 혈성으로 하는 게지, 돈을 가지고 하는 건 아니니까요. 실상 우리 같은 새빨간 무산자가 꿈에 광맥지나 발견하기 전엔, 돈을 모아 가지고 사업을 한다는 건, 참 정말 공상이지요. 사실 남의 고혈을 착취하지 않고서 돈을 모은다는 건, 얄미운 자기 변호에 지나지 못하는 줄 알아요.”

이 말에 정근은 불복인 듯 상체를 뒤흔들며,

“천만에, 그렇지 않…”

하는데, 영신은 갑자기 손을 들어 정근의 말문을 막으며,

“여러 말씀 할 게 없어요. 누가 무슨 말을 하든지 내 신념만은 굽히지 않을 테니까요. 그리고 둘째는요…”

하고 바로 정근의 턱 밑에서,

“난 연애니 결혼이니 하는 문제를 생각할 겨를이 없어요! 오해하시면 안됩니다. 이것도 핑계가 아니고 사실이야요. 내가 청석골에다가 이 일 저 일 벌여논 걸 직접 보셨겠지만, 지금 학원집을 엉터리로 지어 놓고 허리가 휘도록 빚을 졌는데요, 바로 낼모레가 낙성식을 할 날이야요. 한 눈을 팔기는커녕 죽을래야 죽을 틈이 없는 터에, 연애는 뭐고 결혼은 다 뭐야요.”

말이 여기까지 이르자, 부드럽던 영신의 말씨는 점점 여무져 가고, 잠 한숨도 못 자서 흐릿하던 눈에서는 영채가 돈다.

정근은 질문할 말도 대답할 말도 궁해서 과식한 사람처럼 어깨로 숨만 가쁘게 쉬고 있다가,

“그럼 모든 게 안정된 장래까지도 생각을 다시 고칠 수가 없을까요?”

하고 은근히 후일을 기약하자는 뜻을 보인다. 영신은 그 말대답도 서슴지 않았다.

“장래까지도 다시 생각할 여지가 없어요! 난 내 맘대로 약혼한 남자가 있으니까요.”

“네? 정말요?”

정근은 입을 커다랗게 벌리며 몸을 반쯤이나 일으켰다. 영신이가 약혼을 하였다는 것을 여태까지 한낱 핑계로만 여겼던 것이다.

“박동혁이라구 저어 한곡리라는 데서 농촌 운동을 하는 사람인데요. 돈은 한 푼두 없어도 황소처럼 튼튼하고 건실한 동지입니다. 올 봄에 그이의 일터로 찾아가서 앞으로 삼 년 계획을 세우고 왔어요. 그래서 정근씨한테 단념하라는 편지를 한 거야요.”


하고는,

“마지막으로 한 마디 해 주고 싶은 말이 있어요.”



하고 목소리를 흠씬 낮추어 가지고,

“어려서버텀 한 고장에서 자라났구, 또는 여러 해 동안 나 같은 여자를 유념해 주신 정분으로 충고를 하는 건데요, 정근씨가 지금 같은 개인주의를 버리고 어느 기회에든지 농촌이 아니면 어촌이나 산촌으로 돌아가서, 동족이나 같은 계급을 위한 일을 해 주세요! 우리 같은 청년 남녀가 아니면 뉘 손으로 그네들을 구원해 냅니까?”